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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No제목 등록일
416토끼와 거북이의 2차전 달리기 2023-05-28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솝(Aesop)의 우화(寓話)집은 고대 그리스의 노예이며 이야기꾼으로 알려진 이솝이 지은 이야기를 모은 것입니다. 이솝우화는 의인화된 동물들이 등장하는 교훈적인 단편집입니다. 이야기 가운데 <토기와 거북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토끼와 거북이가 어느 날 경주 중에 거북이를 느림보라 생각한 토끼가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잡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토끼가 낮잠을 잘 때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와 결승점에 먼저 도착합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기 내용으 교훈은 토끼는 똑똑하나 게으른 사람, 거북이는 똑똑하지는 못하나 성실한 사람으로 봅니다. 어린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거북이처럼 목표를 정하고 느리지만 끝까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토끼처럼 자신의 실력만 믿고 노력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면 경주에서 진다는 교훈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혼자만 한 방향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사회는 아닙니다. 그래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제2의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이야기합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두 번째 경주(-Tortoise VS. Hare: the Rematch! 프레스턴 러트의 글과 벤 레드리히 그림을 미래아이 출판사에서 번역)입니다. 첫 번째 경주에서 낮잠을 자다 어이없이 패한 토끼가 두 번째 경기에서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고자 경주를 앞두고 특별훈련을 합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훈련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합니다. 드디어 경주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1차전의 경기는 평지였지만 2차 경기는 비탈길이었습니다. 토끼는 경주가 시작되자 쏜살같이 달려 나갑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아직도 출발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북이가 몸을 뒤집더니 자신의 단단한 등 껍데기를 이용해서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토끼는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 것은 이번에도 거북이입니다.
<토끼와 거북이 두 번째 경주>의 교훈은 목표를 정하고 우직하게 달려만 가지 말고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생각을 하는 다원화된 사회입니다. 성공적 인생의 삶을 살려면 너무 고집스럽게 한편만 생각하지 말고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415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2023-05-21
산악인 엄홍길은 경기도 의정부 출신입니다. 집이 도봉산 아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자랐습니다. 주말이면 도봉산에 암벽 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암벽 등산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봉산을 시작으로 높은 산을 등정하는 전문 산악인이 되었습니다. 1988년 9월 에베레스트 산을 시작으로 8000m 높이의 16개봉을 등산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산악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문 산악인들이 히말라야 산맥의 8천미터 높이의 산들을 등정에 성공하므로 에베레스트, k2, 칸첸중가, 로체,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등은 이름만 들어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정등정대가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엄홍길씨도 8천 미터의 16좌를 성공하기 까지는 38번이나 도전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로체샤르 봉은 몇 번의 실패 후 2007년에 성공한 산입니다. 2003년 등정 때는 정상을 마지막 150M 앞에 두고 눈사태로 실패하고 내려왔습니다. 산악인 엄홍길 씨는 실패하면 다시 도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공합니다. 그는 성공할 때까지 도전합니다.
8000m 높이의 산을 등정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어려운 도전입니다. 산소가 희박한 곳이며 빙벽의 위험과 갑작스러운 날씨의 변화로 눈사태의 위험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도전하면서 산 정상에 올라선다는 것은 산악인에게 명예이며 도전하는 가치인 것입니다. 산악인들은 정상에 올라선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전하는 과정이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여깁니다. 등산에는 언제나 성공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또한 조난을 당하여 죽는 일도 빈번합니다. 그런데도 산악인들은 목숨을 담보하며 산을 오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도전(挑戰)>이라는 말을 씁니다. <도전>이라는 말은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이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를 합니다. 운동선수가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 위하여 기록에 도전한다고 하고,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산 정상에 도전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도전하는 곳에 항상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에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도전하는 인생은 아름다운답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실패를 두려워 말고 오늘도 도전하는 인생을 삽시다.
414가정의 달 2023-05-14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 첫째 주일은 어린이 주일,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 셋째 주일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세상에서는 5월5일 어린이 날, 5월8일 어버이 날, 5월15일 스승의 날로 정하여 기념합니다. 이렇게 기념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인생을 살다가 하루쯤은 가정(家庭)을 깊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어린이 주일에는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바르게 양육하자는 것입니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1864) 장군은 아들을 위한 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 주여, 저의 자식이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두려울 때 자신을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게 하시고 정직한 패배에 당당하고 굴하지 않으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백범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은 아들에게 자신의 삶을 알리기 위하여 <백범일지>을 남깁니다. 또한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아내가 보내온 다홍치마를 찢어 '하피첩'을 만들어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를 그려 보내면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딸에게 보냅니다. 어린이 주일은 분명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자 하는 기도가 있는 주일입니다.
둘째로 어버이 주일은 자녀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보답하자는 주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이름인 “어머니”는 자녀를 둔 여인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자녀를 위하여 헌신하는 강인한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만물의 근원으로 표시되기도 하고, 자녀를 위한 목숨까지 내놓는 절대 희생의 모습을 우리는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양주동(1903-1977) 박사는 어머니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또한 “아버지”라는 이름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 가운데 남자 어버이를 가리키는 가족 호칭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은 가정을 이끌러 가는 가장(家長)으로 생존경쟁이 치열한 밀림 같은 세상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한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며 몸부림치는 존재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자녀를 위한 기도와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413어린이 주일 2023-05-07
오늘은 5월 첫째 주일,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로부터 시작하여 지켜오는 주일입니다. 5월 첫째 주일을 <어린 주일> 또는 <꽃 주일>이라 하여 교회에서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많은 행사를 했습니다. 어린이 주일에 담임목사로 여러분에게 몇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
첫째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어린이를 위한 기도와 관심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한 사회의 미래를 볼 때 학교에서 책 읽는 소리, 공장의 기계 소리, 어린이 웃음소리가 있으면 그 사회는 희망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어른들의 기도와 젊은이들의 찬양, 그리고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있을 때 그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작아졌고 아예 없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참된 교회도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작아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 어린이 교육에 투자하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어린이를 교육할 때 결과를 조급하게 바라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교육의 효과는 눈앞에서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세대가 지난 후 교육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지금 가르치면 그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가르침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조급하면 실패합니다. 교육은 학습자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마치 나비가 오랜 시간 번데기로 있다가 때가 되면 껍질을 벗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나오듯이 어린이는 기다려 주어야 성공합니다. 나비가 나올 때 인위적으로 번데기 껍질을 찢어 주면 나비는 날지 못합니다. 나비가 스스로 껍질을 벗고 나오듯 우리는 어린이가 성장하도록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셋째로 세속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부모의 기도는 의무입니다. 꼭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뿐 아니라 바른길을 가도록 부모가 먼저 믿음의 실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자랍니다. 부모는 아이의 모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실천하는 신앙인(coram deo)이 되어야 합니다. 5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서는 바르게 가르치고 가정에서는 관심과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사들을 격려해 주세요.
412스키너 (Amy Skinner) 선교사 2023-04-30
주간에 노회 교육부 행사가 있어 통영(統營)에 다녀왔습니다. 통영은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을 합치면서 통영시가 되었습니다. 통영에 갈 때마다 찾아보는 곳이 있습니다. 세병관(洗兵館), 충무교회, 음악가 윤이상 기념관입니다. 통영의 세병관은 임진왜란 이후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설치되어 있던 곳입니다. 삼도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삼도에 있는 해군을 총지휘 하는 곳으로 지금의 해군 사령부 같은 곳입니다.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여서 <통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세병관이란 무기를 잘 씻어 보관한다는 뜻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관아의 객사입니다. 세병(洗兵)관을 들어설 때 망일루를 지나 지과문(止戈門)을 통과합니다. 지과문은 전쟁을 상징하는 “창(戈과)을 내려놓았다(止지)”는 뜻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문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마음의 갈등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과문을 통과하면서 모든 갈등을 내려놓고 잠시 마음의 평화를 가져보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입니다.
세병관을 내려오면 바로 앞에 충무교회가 있습니다. 충무교회는 1905년 호주 선교사 아담슨(孫安路 A.Adamson)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통영은 1894년 호주 선교부 무어 선교사가 순회 방문함으로 복음 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아담슨을 비롯하여 24명의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 항일민족운동, 사회사업 등을 했으며 무엇보다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특히 충무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진 진명유치원-진명야학교-진명 강습소를 통하여 일제 강점기 때 충무지역의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스키너(Amy Skinner) 여자 선교사님은 진명유치원, 진명학교에서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윤이상 선생은 독일 유학 전 충무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했습니다. 토지의 박경리, 김춘수, 청마 유치환 시인 등이 어린 시절 진명유치원을 다녔습니다. 우리는 지방 여행을 할 때 조금만 생각하면 조상들의 흔적을 볼 수 있고 역사 현장과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면 마음이 겸허해집니다. 특히 선교 현장에는 선교사님들의 열정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게 됩니다. 지방을 다녀올 때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역사적 선교 현장의 교회들을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411외로움 2023-04-23
주간에 헌당, 임직, 은퇴를 준비하다 보니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마음이 분주하니 조용히 앉아 칼럼을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20년 동안 주보에 목회 칼럼을 매주 쓰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느 주간에는 할 수 없이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반복해 올립니다. 이런 주간에는 목회자로 분주한 마음을 여러분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금주에도 할 수 없이 다시 한번 <외롭고 우울할 때>라는 글을 반복해서 올립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던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은 1950년에 <고독한 군중>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미국 시민의식을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외부지향형으로 분류합니다. 그 가운데 외부지향적 인간은 친구와 직장동료들과 기타 주변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귀면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리스먼은 아무리 많은 사람과 사귀며 사는 외부지향적 인간일지라도 인간은 홀로 외로워하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대중 속에 고독>이라고 표현합니다.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라르쉬 공동체(L'Arche Community)의 헨리 나우웬 역시 <영적 발돋움 The Three Movements of the Spiritual Life>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그러기에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격려해주고 함께 나누어 주려고 해도 궁극적 외로움을 탈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가슴을 후비는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가 없으므로 더욱 외로워합니다. 친구들과 재미있는 이야기 하며 한바탕 왁자지껄 놀다가도 돌아갈 때는 혼자입니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현실의 우울감이 우리를 고민스럽게 한다면 목회자로 권면합니다. 차라리 그러면 “외로움을 수용하십시오”. 고요한 고독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고요한 고독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처럼 “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성도 여러분 어쩔 수 없이 혼자 걷는 인생길이라면 차라리 수용하고 힘을 내십시오. 고독한 인생길 주님은 우리와 동행(同行)하십니다. 우리를 결단코 혼자 외롭게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410예배당 봉헌 감사예배 2023-04-16
유럽에는 도시마다 웅장하고 유명한 건축양식의 대성당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바티칸에 성 베드로 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당, 프랑스 파리에 노트르담 성당 등입니다. 이들 성당은 오래된 건축물의 역사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특징과 시대적 건축양식을 나타내며 건물의 웅장함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탄성을 자아냅니다. 본래 초기 성당 건축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미사(Mass)가 제일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축가들의 예술성이 성당의 건축에 작용하면서 인간의 교만과 경쟁심으로 건축비용이 많아지고 기간도 몇 백년 씩 걸리게 되었습니다. 성당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으려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의 목적인 예배보다 건축물을 자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떠나 비본질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솔로몬 왕이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을 7년 동안 건축을 하여 안팎으로 금을 입혔습니다. 내부 장식의 금만 600 달란트 오늘날 무게로 20톤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라 성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열왕기 8장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인으로 하늘과 하늘 위에 계신데 어찌 내가 지은 작은 성전에 오시어 머물러 계실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성전에 오시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특히 성전 건축을 다 한 후 봉헌식에 14일간 온 나라 백성들이 모여 제물을 드렸고 함께 기뻐하는 축제의 시간을 가지었습니다.
우리도 교회당을 믿음으로 건축했고, 교육관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봉헌 감사예배를 23일 드립니다. 교회당은 예배의 처소이며 기도하는 곳입니다. 또한 다음 세대를 가르치며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의 공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공동체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곳에 예배당을 건축한 것입니다. 분명 우리 참된교회 교회당은 예배의 장소이며 교육의 장소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는 기도처입니다. 23일 오후 3시 교회당봉헌 감사예배에 우리 모두 기쁨으로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서원하는 예물의 봉헌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409희망의 부활주일 2023-04-09
<가을의 기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승현 시인은 아버지가 목사님이십니다. 아버지 목회지를 따라 제주와 광주지역과 평양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냈습니다. 1934년 21살에 숭실학교 재학 당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부터 등단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1951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대학에 재직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김현승 교수의 시 가운데 <부활절에>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 부활절에 >
당신의 핏자국에선 / 꽃이 피어 - 사랑 꽃이 피어,
땅 끝에서 땅 끝에서 / 당신의 못자욱은 우리를 더욱
당신에게 열매 맺게 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덤 밖 / 온 천하에 계십니다 - 두루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 로마를 정복하지 않았으나,
당신은 그 손의 피로 로마를 물들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유태인의 옛 수의를 벗고
모든 4월의 관(棺)에서 나오십니다.

모든 나라가 / 지금 이것을 믿습니다
증거로는 증거할 수 없는 곳에
모든 나라의 합창은 우렁차게 울려 납니다.
해마다 삼월과 사월 사이의 / 훈훈한 땅들은,


밀알 하나가 썩어서 다시 사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 파릇한 새 목숨의 순(筍)으로....
2023년 부활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 성스러운 부활의 아침에 우리의 믿음이 다시 한번 부활하기를 원합니다. 2천 년 전 스승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절대 절망으로 다가올 때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은 그들에게 새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문제로 절망하는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이 새 희망으로 함께 하옵소서!
408희망의 4월 2023-04-02
4월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4월을 <잔인한 4월>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목회 칼럼 글에서 몇 번 언급하면서 그 뜻을 밝혔습니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탄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Eliot)이 쓴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년 작품)의 첫머리 제1부 The burial of the dead (죽은 자의 매장)에서 ‘잔인한 4월’(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
시인 T.S 엘리엇(Eliot)이 4월을 잔인하다고 표현한 것은 역설(逆說)적인 표현입니다. 엘리엇이 황무지(1922년)를 쓸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이 없는 황무지 같은데 눈치 없는 봄의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대지에 비를 뿌리어 꽃을 피우고 희망을 속삭이니 잔인한 4월이라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4월은 대지에 꽃을 피우고 새들은 봄을 노래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 없는 황무지이기에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 말하게 된 것입니다.
만물이 새롭게 움트는 봄, 파릇파릇 새싹이 무거운 흙덩이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희망의 봄. 진달래, 개나리 꽃소식을 들으며 나물 캐러 동구 밖 들로 나가는 아이들의 아름다운 봄. 종달새 울며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얼었던 마음에 희망을 새싹을 가져오는 봄. 하지만 우리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재난 문자와 미세먼지로 눈을 뜨지 못하는 잔인한 4월은 여전합니다. 그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일상생활에서 마스크를 벗었지만, 아직도 3월 31일 기준 1일 1만 명이 넘는 신규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환경이 어려워도 전염병의 위기가 닥쳐도 전쟁이 일어나도 비바람이 불어도 4월이 되면 대지 위에 꽃은 필 것입니다. 그러기에 4월은 <희망의 4월>입니다. 4월, 부활절, 우리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희망의 4월에 우리 모두 새롭게 결단하고 도전하길 바랍니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욥14:7)
407사랑의 눈을 뜨라 2023-03-26
몇 주 전부터 교회 안에 약간의 분쟁이 있는 교회에 임시당회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을 만나보니 참 순수하고 착한 분들입니다. 서로의 입장을 말할 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조금 내려놓고 조금 넉넉한 마음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바라보면 포용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복음의 본질 부분은 같은데 비본질적 요소인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이 서로가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자신들이 얼마나 존귀하고 착하고 가능성 있는 교회공동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득 박목월 선생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믿음의 흙> - 박목월 -
제비는 진흙을 이겨 집을 짓는다. / 진흙이 무엇을 뜻하는 것임을 모르고
알을 까기 위하여 그것을 이겨 / 집을 짓는 맹목적인 슬기,
진흙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누가 알랴 / 그것을 이겨 눈에 바르고,
보냄을 받은 실로암의 연못에서 / 씻음으로 장님은 눈을 뜬다.
심령의 눈 먼 자여, 영혼의 장님이여 / 안다는 그것으로 눈이 멀고,
보인다는 그것으로 보지 못하는 / 우린 아집 속에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게 하라.
진흙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 제비는 둥우리를 마련하여 알을 까는 믿음.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보냄을 받은 실로암의 / 연못에서 눈을 씻자.
우리는 어리석게도 눈이 멀어 진리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무지의 상태에서 아는 척하는 고집스러운 자기주장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에게 진흙을 발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요9:7)하셨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제비가 진흙을 물어다 집을 짓는 것처럼 예수님의 진리의 진흙으로 우리의 무지와 아집의 눈을 뜨라고 합니다. 제가 임시당회장을 맡은 교회나 우리 참된 교회 모든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는 믿음의 눈을 떠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