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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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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천국여행길 2013-07-06

어느 달리던 버스 안에서 앞좌석에 앉아있던 노인이 버스기사에게 시비를 걸어 서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달리던 던 버스는 길가에 멈추어 서게 되었고 함께 타고 가던 많은 승객들이 어리둥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기사에게 시비를 건 노인은 계속해서 큰 소리를 쳤습니다. 참다못한 승객들이 버스기사 편을 들면서 시비를 걸고 큰 소리 치는 노인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이제 그만 출발하자고 이구동성으로 기사에게 재촉을 합니다. 그런데 노인은 막무가내로 기사와 승객들에게 달려듭니다.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지금 이 버스는 우리가 가려는 대전으로 향하지 않고 영동고속도로 접어들어 동해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노인은 승객들에게 우리는 지금 잘못 가고 있습니다소리치며 주의를 환기 시켜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많은 승객들은 노인이 버스기사와 다투는 이유를 알게 되었고 승객들은 마음을 모아 기사에게 목적지인 대전으로 갈 것을 주장하여 원하던 목적지에 갈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간혹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버스에 앉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와 싸우는 노인을 보면서 왜 기사 싸우느냐고 하면서 옳은 주장을 하는 노인에게 핀잔을 주면서 일방적으로 기사 편을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전체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글로벌 포지셔닝 시스템)라는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GPS 시스템은 미국에서 개발하여 무기 유도, 항법, 측량, 지도제작, 측지, 시각동기 등의 군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을 민간용으로 공개함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위치결정시스템을 가지고 지도에 적용시켜 네비게이션(Navigation)을 만들어 운전자에게 정확한 주행을 도와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국행 버스를 탄 것입니다. GPS 시스템에 의하여 정확하게 천국으로 목적지를 입력해놓았습니다. 하지만 간혹 천국행 버스 안에서 아무렇게나 가면되지 하면서 원리를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천국 여행길에 성경의 원리를 무시한다면 여행의 도착지가 엉뚱한 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참된 교회는 성경의 원리를 따르는 교회로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까지 완전하게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마음의 여유로움 2013-06-29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12월 영국의 B.B.C 방송은 각계각층의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의 수상을 선정했는데 제1위가 윈스톤 처칠(Winston Churclill 1874-1965)이 선정되었습니다. 처칠이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선정된 이유는 그의 낙천적 성격이 큰 점수를 얻었습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지도자이지만 늘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지도자였습니다.

처칠은 중학교 때 세 번이나 진급을 하지 못한 낙제생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1940년에 영국의 보수당 당수가 되었고 영국의 수상이 되어 루즈벨트(Roosevelt) 스탈린(Stalin)등과 함께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했고 1953< 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는 웅변가며 문필가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한 연설중 옥스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포기하지 말라 - Don’t give up ! ”는 연설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낙제했을 때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인생의 여정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처칠은 1915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해군을 이끌고 작전을 전개하던 중 여러 척의 배를 잃고 2만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처칠은 해군 장관직을 내놓게 되지만 이듬해 다시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갑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그는 늘 병사들에게 친절했으며 용기 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쟁은 웃으며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병사들에게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처칠의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태도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전쟁터의 병사들에게 삶의 여유를 가지게 했습니다.

무한경쟁 시대에 일등만 살아남는 처절한 삶의 투쟁 속에서 늘 긴장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경쟁에서 지면 어찌하나, 성공하지 못하면 어찌하나, 사업에 실패하면 어찌하나하는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조급하게 하고 긴장시킵니다. 긴장의 삶의 현장에서 <전쟁은 웃으며 하는 거야>라는 처칠의 여유로움을 새겨봅시다.

14청백리(淸白吏) 황희 정승 2013-06-09

조선시대 청백리(淸白吏)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황희(黃喜, 1363년 - 1452년) 정승이 있습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재상(宰相)이었습니다. 고려 말에 관직에 나갔다가 1392년(공양왕 3년)에 고려 멸망 후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고려 충신 72명이 두문동에 들어가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황희 정승도 72명중 한 명이었지만 이성계와 그 외 사람들이 함께 새 나라를 세우자고 권하여 황희 정승은 출사(出使)를 합니다 그후 그는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으로 권력을 누리는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원만하고 유순하여 주변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고 관료생활 중에 많은 치적을 남겼습니다. 세종대왕 때 영의정으로 농법 개량, 예법 개정, 천민 소생의 부역 면제 등으로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가 생존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청백리로 보았으나 실재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검찰총장의 자리와 같은 대사헌으로 있을 때 금을 받고 청탁된 사건을 해결해주었다고 하여 황금 대사헌이라는 조롱을 받았고, 간통죄로 쫓기는 여인을 숨겨주어 그 여인과 부정한 관계를 했다하여 간통죄를 범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황희정승의 문제는 불륜, 뇌물수수, 재판 불법개입, 국가 전답 부당매입 등 다양한 부정이 조선왕조 기록인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황희 정승의 청백리는 과장되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미화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어찌되었던 그는 말년에 87세에 파주의 한강하구에 반구정(伴鷗亭)을 지어 갈매기와 벗 삼아 여생을 보내다 90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역사가들은 크고 작은 오점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황희정승을 청백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7-80년의 짧은 삶을 살면서 언제나 바르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청백리의 대명사인 황희 정승처럼 우리의 삶의 발자취에 오점을 남기지 맙시다.

13역할의 과중과 모호성 2013-06-01

다원화되고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스트레스(stress)를 받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라는 말은 의학용어로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신체적 긴장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긴장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심장병·위궤양·고혈압 등의 신체적 질환을 일으키기도 하고 불면증·노이로제·우울증 등의 심리적 부적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현대의학자들이 지적하기를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에 대한 도전과 긴장감이 생기어 자신의 삶을 유익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지나친 스트레스는 심리적 부작용뿐 아니라 신체적으로 질병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면 좋으련만 하지만 살다보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특히 조직사회로 구성된 직장생활은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직장상사와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부하직원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통하여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또한 근본적 문제로 직장에서 자신의 역할 때문에 갈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장에 출근하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의 역할이 모호하면 많은 갈등 속에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즉 역할의 모호성(Role ambiguity)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입니다. 연극을 하는 배우가 무대의 막이 올라갔는데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사도 모른다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이와 같이 직장에 출근을 했는데 자신의 역할이 모호하다면 얼마나 마음에 큰 갈등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점검하면서 분명한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어야합니다.


또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중 하나는 자신의 역할의 과중성(Role overload)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재능이 많아도 개인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게 되면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직장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역할의 모호성과 역할의 과중은 항상 갈등을 초래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일과 하지 못할 일을 구분하여 소신 있게 행동합니다.

12덤으로 사는 인생 2013-05-25

우리에게 잘 알려진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년)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백치> <백야> <죽음의 집의 기록>등 너무나 많은 작품을 쓴 작가입니다.

 

그는 러시아 귀족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작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여의치 않아 군인학교에 들어가 1841년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합니다. 그러나 작가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1844년에 제대하고 1846년에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를 발표합니다.

그 후 그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급진적 젊은 지식인들의 정치적 모임에 가담합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따르는 급진적 사조는 공상적 사회주의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정치적 모임을 주도하다가 1849년에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게 됩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서유럽의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젊은 지식인들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언하고 마지막 사형집행 직전에 사면해주는 정치적 연극을 꾸미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두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 총살직전에 사면이 된 그는 훗날 사형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을 <백치>라는 작품에서 “사형수들에게 5분을 준다면 2분은 동지들과 이별하는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고 표현합니다.

사형집행 직전 사면이 된 그는 그 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가 4년 만에 돌아와 작품을 쓰기 시작합니다. 사형집행 직전 사형대에서 살아난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평생 그의 마음 한편을 지배했습니다. 죽음의 사형대에서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후 그의 삶은 적극적이 되었고 작품 활동에 몰입하여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와 같은 명작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대에서 살아난 것처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삶은 은혜에 감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11힐 링(healing) 2013-03-10

우리사회에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한참 유행하더니 이제는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T.V프로그램중에도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웰빙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자는 의미의 유행어라면, 힐링은 병든 것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의미의 치유라는 말입니다.

힐링은 병든 몸을 의사들이 진단하여 약물이나 수술로 치료하는 외부적 행위의 치료가 아닌 사람의 내면의 마음의 치유를 말합니다.


한때 미국의 아마존 닷컴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했던 힐링소사어티(Healing Society)의 저자 이승헌씨는 힐링을 마음의 깨달음으로 표현하면서, 도가(道家)의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의 노,장자(老,莊子) 사상에 근원을 두고 단학과 뇌운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힐링은 최근 요가, 마음수련, 명상등으로 우리들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또한 힐링여행,  힐링콘서트, 힐링트래킹, 힐링숲길, 힐링캠프등 다양한 용어의 키워드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힐링이라는 말이 우리사회에 친근한 말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우리사회는 젊은이들의 취업문제, 노인들의 돌봄의 문제, 기업의 비정규직 노동문제, 대학입시중심의 교육문제등 너무나 우리들을 우울하게하며 마음의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불안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며 결국은 세상을 등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하며 대중문화처럼 되어버린 사회는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병든 사회라는 것입니다. 병든 사회이기에 힐링이라는 말이 정겹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복음으로 영혼을 치유하여 평안을 회복시켜주어야 하는데 교회마저 외형적 부흥에 치중하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더 병들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우리사회에 평안을 주지 못하므로 사회가 병들어 힐링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영혼에 관심을 두어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진정한 복음 안에서의 영혼 힐링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10천국항해(天國航海) 2013-01-13

1961년 미국의 J.F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의 공산화는 동아시아의 공산화를 초래한다하여 미군을 베트남에 파견합니다. 그 후 1965년에 미군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본격화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처음엔 의료지원단을 보냈지만 1965년 10월에 청룡부대와 맹호부대를 파병하면서 베트남전에 깊이 참여합니다. 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루한 전쟁으로 어려워진 미국이 결국 휴전을 제의하여 1973년 1월에 파리에서 휴전협정을 하고 미군의 전투주력부대를 철수시킵니다. 그러나 북쪽의 공산군이 미군의 전투주력부대가 철수하자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어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전쟁이 끝나자 승리자가 된 공산군은 사람들을 처형하기 시작합니다. 사이공 함락 36시간 만에 26만명을 처형하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처형의 현장에서 살기위하여 사람들은 베트남을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1980년 경향신문은 배로 탈출하는 보트피플(boat people)이 1975년- 1980년까지 100만 명에 이르렀고 바다에서 구조되지 못해 죽은 숫자가 14만 명이 된다고 보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기위해 베트남에서 탈출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지만 이들을 받아주는 나라가 없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됩니다. 당시 이웃 나라들이 이들을 구조해주지 않는 이유는 정치적 외교문제와 이들이 가난하기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부산에 베트남난민수용소가 있었으나 1993년 마지막으로 난민160명을 뉴질랜드로 보내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보트피플 선상난민(船上難民)은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살기위해 탈출은 했으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보트피플을 인생여정으로 비유한다면 나그네 인생길에 최종목적지가 없는 사람들을 보트피플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가 돌아갈 항구가 있으면 희망찬 항해를 합니다. 그러나 보트피플처럼 돌아갈 곳이 없으면 절망의 표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갈 고향인 최종 목적지 천국이 있습니다.

2013년 우리의 최종 목적지 천국을 향해 희망찬 항해를 합시다.

9인생의 전환점 2013-03-31

1902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의 어느 교회에 부크맨  ( Frank N. D. Buchman) 이라는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어려운 교회를 담임한지 5년 만에 대형교회로 부흥시켰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과정에서 너무나 앞만 보고 달렸기에 교회는 부흥되었지만 목사님의 영적 상태는 탈진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자신의 영성회복을 위하여 교회를 사임하고 영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영국을 여행하던 목사님은 어느날 케스웰이라는 작은 마을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이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여행 중이기에  목사님은 주일예배를 의무감으로 시골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13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골목사님이 어찌나 열정으로 설교를 하시었던지 부크맨 목사님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당시 시골목사님의 설교의 내용은 <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부크맨 목사님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이날처럼 구속의 은총과 부활의 진리가 자신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를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이날 케스웰의 시골교회에서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훗날 목사님은 이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날의 영적 은혜는 부크맨 목사님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날이후로 목사님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영적 경건운동을 전개합니다. 
목사님이 전개한 영적 경건운동은 1938년 6월4일에 세계적인 영적 운동인 도덕재무장 M. R. A ( Moral Re-Armament 절대정직·절대순결·절대무사·절대사랑 )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도덕 재무장(M. R. A) 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을 중심으로 크게 전개되었습니다. 


부크맨 목사님은 여행중 영국의 작은 마을 케스웰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고, 영성운도인 도덕재무장(M.R.A)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영적인 새로운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8잡초(雜草) 2013-03-17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온실의 환경에 익숙해 있기에 온실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여름철 비바람을 막아주고 추운겨울 보온을 해주는 온실의 보호막이 있기에 화초는 살 수 있습니다. 화초는 온실의 보호막이 없어지면 시들해지고 결국 죽게 됩니다.


하지만 잡초(雜草)는 자라가는 환경을 누가 마련해주지 않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잡초입니다.

사전에서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고 설명합니다. 잡초는 누가 가꾸지 않아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번식해갑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지을 때 잡초는 뽑고 뽑아도 계속해서 자라기에 골치를 아파합니다. 최근에는 잡초를 제거하려고 아예 밭고랑에 비닐을 덮어버립니다. 잡초의 무한한 생명력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용혜원 시인은 <잡초>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 아무도 반기지 않아도 /서성거리기 보다는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하기에 /살아야겠다는 열망으로/ 생명의 줄을 이어갑니다./ 이름 모를 꽃이 피어도 / 누구든 사랑해 주면/ 한동안의 행복도 가져보지만/  떠가는 구름이 / 한줄기 비라도 /쏟아 놓으면/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버려진 땅에서도 / 진한 목숨만은 / 어찌할 수 없어 / 언제든 오신다면 /쉬어갈 자리는 /비워 놓겠습니다. >   

잡초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내리는 꿋꿋함과,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걷어차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올라오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잡초의 무한한 생명력은 작은 고난에도 쉽게 포기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환경을 탓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80평생 인생 여정 길을 가는 동안 온실처럼 언제나 평안하고 순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비바람이 부는 사나운 날씨와 같은 시련과 역경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길은 어떠한 환경에도 꿋꿋하게 자라는 잡초처럼 시련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욥24:16)

7잔인한 4월, 희망의 새싹 2013-04-28

1948년 노벨 문학상을 탄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Eliot)이 쓴 ’황무지’(The Waste Land : 1922년 작품)의 첫머리 제1부 The burial of the dead (죽은 자의 매장)에서 ‘잔인한 4월’(April is the cruelest month)로 표현되면서 4월을 잔인한 달로 말하기 시작 했습니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시인 T.S 엘리엇(Eliot)이 4월을 잔인하다고 표현한 것은 역설(逆說)적인 표현입니다.

엘리엇이 황무지를 쓸 당시 1차세계대전후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희망이 없는 황무지와 같은데 눈치 없는 봄의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대지에 비를 뿌리어 꽃을 피우고 희망을 속삭이니 잔인한 4월이라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계절은 꽃피고 새 우는 4월인데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 없는 황무지이기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은 2013년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4월 마지막 주일은 우리에게는 시인 엘리엇이 표현한 황무지 같은 희망 없는 잔인한 4월이 아니라. 죽은 땅에 라일락을 키워내고, 엄동설한 추운 겨울 꽁꽁 얼었던 대지의 딱딱함을 실낱같은 생명력 하나로 뚫고 나오는 새싹 같은 희망의 4월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은 자신의 살아 있음을 대지에 외치며 어두운 땅 속을 비집고 파릇파릇 움트는 모습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의 모습입니다. 생명의 새싹이 움트는 4월 우리에게는 잔인한 4월이 아니라 희망이 움트는 새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욥1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