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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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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용납하고 하나 되는 공동체 2023-12-03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경읽기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금요일 12월 1일에 바울서신 에베소서를 읽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엡 2:1-10절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 진리는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값없이 얻는 것임을 강조하는 대표적 구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왜 에베소 교회에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강하게 표현하며 가르쳤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세웠고 3년 동안 목회한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 중에 애정이 가는 교회입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교리적 분열로 서로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옥중서신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구원 진리를 강조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 얻은 것이 우리의 행위로 얻은 것이라면 교회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값없이 얻은 구원이기에 교회 안에서 누구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엡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는 화목하며, 성령이 하나 되게 하는 줄로 서로 연결하도록 매고 서로 평안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일치하고 하나 되려면 ‘인내하고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교회 안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하다 보면 서로가 불편합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를 계속하다 보면 분쟁이 일어나고 교회가 분열되게 됩니다. 참된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가 믿음이 부족하여 그 행위가 어린아이 같아도 서로 용납하고 화목하고 일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일치하는 하나 되는 공동체입니다.
441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 2023-11-26
지난 주간에 산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집입니다. 1979년 초판 발행 후 2022년 개정으로 16판을 찍은 유명시인의 시집입니다. 시집의 전체 시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슬픔 많은 이 세상에도’라는 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찬찬히 읽어보면서 시인이 표현하려는 슬픔의 뜻이 좋았습니다. 시인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슬픔을 가지고 산다. 그렇다고 주어진 슬픔 때문에 고귀한 인간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슬픔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기다리고 기다리면 슬픔은 사라지고 행복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슬픔이 많은 세상에도’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첫눈 내리는 새벽 눈길 걸을 것이니
지난가을 낙엽 줍던 소년과 함께
눈길마다 눈사람을 세울 것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나러 돌아올 것이니
살아갈수록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
평등의 눈물들을 보여주면서
슬픔으로 슬픔을 잊게 할 것이니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
부질없이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 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
슬픔이 있는 사람이라고 늘 슬퍼만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다 보면 슬픔이 슬픔을 잊게 해 줄 것입니다. 또한 봄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며 슬픔이 있는 사람끼리 위로하며 살다 보면 슬픔 많은 세상도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렵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다 보면 슬픔의 현실이지만 산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440무제(無題) 2023-11-19

허전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주간에 오랜만에 서점에 갔습니다. 책 두 권을 샀습니다. 한 권은 제목에 끌려 샀고, 한 권은 유명 시인의 시집을 샀습니다. 제목에 끌린 책은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입니다. 프랑스 심리전문가 크리스텔 프티콜랭이 쓴 책입니다. 현대인들은 생각이 많고 정신을 과잉 사용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스스로 피곤해한다는 관점의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책 소개를 하면서 <생각 과다, 감정 과잉, 감각 과민--- 모든 게 넘치는 당신에게 필요한 ‘적당히 요령 있게’ 세상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나는 제2장에서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정신적 과잉 활동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중심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제5장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이야기도 있다’처럼 더러는 덮어두고 사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세상 모든 일에 끼어들며 자기만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신 과잉 사용자들입니다. 조금은 남의 일을 외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집을 읽으며 ‘맹인 부부 가수’라는 시가 감동을 주었습니다. 겨울밤 눈 내리는 거리에 맹인 부부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고 눈사람을 만들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합니다. 봄이 오면 눈사람은 녹지만 희망의 눈사람은 봄이 와도 녹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합니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는 눈사람 되었네> 너무나 감동의 표현입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희망의 눈사람, 어떤 상황에도 녹지 않는 눈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녹지 않는 눈사람의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희망을 노래합시다.
439어둠은 빛 앞에 머물지 못합니다 2023-11-12
오래 전 글을 한 번 더 올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삶이 어려워도 내일을 생각하며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말 중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성경의 말씀으로 종교개혁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칼빈은 세 라틴어에 단어에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했습니다.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Post tenebras Lux)입니다. 이 말은 “어두움이 지나면 반드시 빛이 온다”는 뜻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군사를 동원하여 종교개혁자들을 집단 학살했으며, 유럽 곳곳에서 종교재판을 하여 개혁자들을 화형 시키는 때였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인 “위그노”(Huguenot)들을 무차별 처형하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어두운 시기는 지나갈 것이고 반드시 밝은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 거야 /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 거야 /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 울릴 테니 /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 걸
우리는 고난의 시기가 길어지면 희망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리 긴 고난의 시간이 닥쳐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Post tenebras Lux)를 믿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은 다시 시작되고>라는 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으로 내일을 기대합시다. 어둠은 빛 앞에 물러갑니다.
438기도의 힘 2023-11-05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일대기를 전기 형태로 쓴 책입니다. 링컨에 관한 많은 책이 있지만 이 책은 제목이 말하듯이 기도하는 대통령을 강조한 책입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 그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31세 때 사업 실패, 32세 때 주 의회 의원 선거에 낙선, 34세 때 사업 실패, 35세 때 신경 질환 발병, 43-47세까지 하원 의원 선거에 세 번 낙선, 55세 상원 의원 선거에 낙선, 56세 부통령 낙선, 58세 때 상원 의원 선거에 낙선됩니다. 그 후 60세가 되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링컨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으나 거듭되는 낙선을 실패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위대한 점은 실패 때마다 항상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남북 전쟁이 한참인 1863년 4월30일 목요일을 <금식하는 날>로 선포하고 온 국민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미국 국민에게 금식을 선포할 정도로 기도의 위대한 힘을 알고 있는 대통령이었습니다. 링컨은 전쟁터에서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링컨은 전쟁이 끝난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북군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다. 우리에게 남군의 로버트 리 같은 용맹스러운 장군이 없었음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더욱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남북 전쟁의 승리를 용감한 장군의 힘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승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영국의 튜터 왕조의 메리 여왕은(Mary 1542-1587년) 종교개혁자들을 핍박한 왕입니다. 개혁주의 성도들을 너무나 많이 죽였기에 역사는 그녀를 피의 여왕(Bloody Mary)이라고 기록합니다. 잔인하게 개혁자들을 핍박한 메리 여왕에게도 두려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낙스(John Knox, 1513~1572)입니다. 메리 여왕은 ‘나는 100만 명의 군대보다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를 더 두려워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위대한 힘입니다. 또한 절망적 상황인 사람에게 희망의 도구입니다. 2023년 가을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김현승 교수의 표현처럼 가을에 우리 모두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437종교개혁 주일 2023-10-29
클뤼니 수도원은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300Km 떨어진 부르고뉴 주(州)의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910년 아퀴타니아의 빌헬름 공작(Guilaume de Aquitaine )이 자신의 별장을 교회에 기증하면서 설립되었습니다. 건물의 크기만 하더라도 축구장 2개를 연결한 것만큼 큰 수도원입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설립 초기부터 영성에 관심을 두고 교회개혁을 단행한 수도원입니다. 당시 수도원들은 교회의 본질인 영성보다는 세속의 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제후들과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직자들을 이용했고, 성직자는 그들의 권력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농지를 받았고,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세금 면제, 교회의 치외법권 허용, 재판권 부여, 화폐 제조권, 관세 권리 등 교회는 세속의 경제적 특권을 누렸고 수도원장은 지역 제후처럼 행사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이러한 교회의 타락을 개혁하고 신앙의 본질인 영성을 회복하려고 세워진 수도원입니다.
설립 때부터 클뤼니 수도원은 봉건적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경비는 신자들의 자유로운 헌금으로 하며, 수도원장의 선출은 직선제로 하고, 생활은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와 노동과 공동예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명문화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10-11세기 교회개혁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뤼니 수도원도 세월이 지나면서 설립 당시 영성을 잃게 되니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프랑스 국립 종마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수도원 개혁의 대명사였던 클뤼니 수도원도 영성을 잃게 되니 앙상한 건물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영성을 잃어버리면 건물만 남는 박물관 유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506주년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말처럼 오늘의 한국교회는 진정성 있게 말씀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지 말고 영성 회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모두 500년 전 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외침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개혁은 외치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영성 회복의 첫걸음은 예배 회복입니다. 종교개혁 주일에 예배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436재림(再臨-파루시아) 2023-10-22
지난 월요일 노회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 일찍 쉬려다가 이렇게 잠들면 내일 아침 새벽 본문을 묵상하지 못하고 강단에 오를 것 같아 잠이 오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17일(화) 본문 마태복음 25:1-13절을 묵상하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늘 읽던 본문인데 이날은 나에게 본문이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본문은 열 명 처녀 비유입니다. 열 명의 신부 들러리들이 등불을 준비하고 신랑을 맞이하려고 기다릴 때 신랑이 늦게 왔습니다. 신랑이 너무 늦게 오므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떨어져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이때 혼인집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 깨어 준비한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잔치에 참여하지만 깨어 있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16일 저녁 본문을 묵상하면서 나는 깨어 있고 기름을 준비했는가? 아니면 미련하여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여러 번 나에게 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피곤하여 일찍 잠자려던 몸이 긴장되며 잠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깨어 있는가?, 주님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 분명 나는 준비했다고 다짐해 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심이 들어 불안감이 마음에 스며드는 것은 부족한 나의 믿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 믿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다짐하면서 한편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글을 쓰면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주님이 재림한다면 ‘아멘 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마라나타(Μαραναθα)’라고 외치며 주님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파루시아(παρουσ?α)는 재림(再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왕이 갑자기 특정 지역에 나타나 백성을 격려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두 번째 다시 온다는 재림이라는 말보다는 갑자기 온다는 뜻이 더 강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재림하십니다. 그리고 갑자기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깨어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가 등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참된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깨어 믿음으로 주님 재림을 준비합시다.
435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2023-10-15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大韓獨立)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自主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同胞)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우리에게 ‘상록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 육조(六曹) 앞 넓은 길 울며 뛰며 뒹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라는 내용의 시입니다.
김구 선생님, 심훈 선생님은 평생의 삶을 일제강점기 때 오직 나라의 독립을 소원하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갈급한 소원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 열정을 가지고 살게 하며,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참고 인내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8복 가운데 4번째 복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배부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타는 듯한 목마름 같은 갈급한 소원을 말합니다. 만약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소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갈급한 소원은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소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의는 세상의 정욕과 물질,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갈급함을 말합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나라의 독립을 갈망했던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갈망하고 소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죽을 만큼 사랑하며 갈망하는 삶을 삽시다. 갈급함이 있는 우리에게 주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행복한 자여! 그대는 의에 주리고 갈급함이 있는 자이다. 주께서 그 소원을 이루실 것이다.”
434애통하는 자의 복 2023-10-08
우리는 젊은이들을 부를 때 기성세대와 생각이 다른 새로운 세대라고 하여 신세대(新世代)라고 부를 면서 X세대, Y세대라고 표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어 알파벳 X, Y, Z의 마지막으로 표현되는 Z세대라고 하면서 또한 Z세대의 마지막 끝자락을 밀레니엄(millennium)+Z세대라고 부르며 MZ세대라고 합니다. MZ세대의 특징이 여러 가지이지만 단순하게 즐기는 문화에도 개인주의적이며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특징의 세대입니다. 글로 소통하기보다는 이미지와 비주얼로 소통하며 SNS로 사진 한 장으로 자기표현을 합니다. 여행을 해도 핫 플레이스라 불리는 곳에 가서 인증 샷으로 공유합니다. 유튜브, 넷플릭스를 즐기며, 생필품에서 명품과 미슐랭 음식까지 인터넷 주문으로 하는 배송문화의 중심에 있는 세대입니다. 지금 이렇게 일반적인 표현으로 이것이 MZ세대라고 규정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부정하며 또 다른 표현 방식으로 자신들을 내세우는 세대가 MZ세대입니다.
지난 주일 팔복을 중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현대사회는 기성세대부터 MZ세대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볍게 즐기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하게 즐겁게 생각하는 시대에 애통하는 자가 행복하다고 강조해야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슴 치며 슬퍼하고, 분통을 터트리며 억울해하고, 절망의 상황의 애통하는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만사형통, 근심 걱정이 없는 자가 행복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슬퍼하며 통곡하는 자가 행복한 자라고 말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에 애통하는 자는 하늘나라의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믿어지고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보며 애통해하고 자신의 죄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회개의 외침이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한 결론은 하늘나라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제자답게 애통하는 자의 행복으로 하늘의 위로를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5:4)
433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 2023-10-01
마태복음에 32번이나 나오는 천국(天國)이라는 말은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의 한자어 표현입니다. 천국 즉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왕이며, 주인이 되시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왕으로 다스리는 왕국이기에 흠이 없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언제나 공의가 실현되며 악과 사탄은 심판을 받고 평화가 넘치는 행복한 나라입니다. / 이사야 11장에 하늘나라가 오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 미가 선지자는 미가 4:3에는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라고 예언하면서 평화의 나라를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 하늘나라의 행복을 팔복으로 말씀하십니다(마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하늘나라의 행복을 선포하십니다.
1516년 영국의 토머스 모어( Thomas More 1478년-1535년)는 인간이 꿈꾸는 이상 국가를 <유토피아(u-topia)>라고 말합니다. 유토피아는 그의 작품 제목으로 “가장 좋은 국가 통치 형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한 진실이 담긴 황금 같은 책자”로 긴 제목을 붙였습니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ou(없다)+topos(장소)라는 단어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더 좋은 사회, 행복한 나라”에 대한 꿈과 이상을 기대하며 동경하는 희망의 나라입니다. 토머스 모어가 소개하는 유토피아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이상국가(理想國家)로 꿈꾸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의 나라를 예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되며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하늘나라를 이룹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