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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순교자 김관주 목사님 | 2015-04-04 |
북한에서 순교한 김관주(1904-1950(?)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은 1904년 평안남도 안주의 장로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이 철저한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공부는 숭실학교 졸업한 후 일본의 동지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일본 유학시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35살에 일본에서 신학을 마치고 1938년 신의주 제2교회의 부교역자로 목회를 하셨습니다.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2교회로 부임 하게 된 것은 당시 제2교회의 담임목사이었던 한경직 목사님(훗날 영락교회담임)의 요청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일본에서 잠시 김관주 목사님과 만남이 있었는데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 제2교회로 부른 것입니다. 신의주 제2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던 중 한경직 목사님이 일제의 압력에 의하여 물러나게 되자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2교회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김관주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1년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목사님은 해방이 되어 출옥하시어 평양의 서문밖교회를 담임하게 되십니다. 목사님에게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 다시 공산당들에게 잡혀 사동탄광으로 보내졌습니다.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김관주 목사님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몇 일전 북한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죽일 때 순교한 것으로 봅니다. 함께 사역하셨던 한경직 목사님은 회고록에서 김관주 목사님에 대하여 “ "김관주목사는 유능한 설교자, 학자풍에 성격은 강직하고 진실하고 능력도 있어 일제 말기 당국과의 마찰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잘 해결해서 교회의 환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김관주 목사님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분이 총신대학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시던 김명혁 교수님이십니다. 김명혁 교수님은 아버지 김관직 목사님이 사동탄광에 강제노역을 하실 때 1948년 7월 당시 나이 11살의 어린 나이에 남쪽으로 내려오시어 어렵게 사는 가운데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예일대학에서 교회사를 공부한후 귀국하여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셨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4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김관주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귀한 인품과 강직한 신앙의 목사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아들인 김명혁 교수님에게로 이어지는 신앙의 유업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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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고난의 유익 | 2015-03-28 |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인생의 여정 가운데 고난을 겪게 됩니다.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살다간 사람일지라도 한 두번은 고난의 순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 여부가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이 찾아오면 그 고난의 순간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슬기롭게 대처하므로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난의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여 인생을 방탕하게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고난 속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은혜를 깨달아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고난을 통하여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한 방법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어린 포드는 어머니를 구하려고 급히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의사를 모셔왔을 때는 이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그는 빨리 의사를 모시고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어린 포도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훗날 포드는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만들게 됩니다. 훗날 자동산업에 성공한 포는 그의 건물 안에 그를 기념하는 사진과 글을 남깁니다 . < 포드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포드의 꿈과 희망은 어머니의 죽음이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 고난은 반드시 나쁜 것만 아닙니다. 어느 때는 고난이 우리에게 큰 축복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당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이 가져다 주는 새로운 비전에 도전해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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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예수 소망 | 2015-03-21 |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72년 어느 날 미군이 트랭방 지역에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트랭방에서 사이공에 이르는 1번 국도를 차지하기 위한 베트콩과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미군은 네이팜 탄을 투하하여 한 지역을 완전히 불바다로 만듭니다. 이때 불타는 마을에서 온몸에 화상을 입고 거리로 뛰어 나오는 9살 된 킴 폭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AP통신의 군종 기자였던 닉 우트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달리는 이 소녀의 사진을 찍어 보도합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중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닉 우트는 그 소녀를 병원으로 후송시켰습니다. 후에 이 사진 한 장으로 닉 우트는 언론인에게 명예롭고 권위 있는 퓰리쳐 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 사진은 미국에서 월남전 반대 시위가 더욱 거세게 일어나게 했습니다. 사진속의 아이였던 킴 폭은 17번의 수술 후 생명을 건졌으나 온 몸에는 화상의 흔적은 남았습니다. 그 후 그녀는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살면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그녀는 더 이상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잔인하게 네이팜 탄을 투하한 사람들을 미워했으나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녀는 용서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알게 된 그녀의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한 후 유엔의 명예대사로 임명되어 전쟁의 잔인함과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리며 평화를 호소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1996년 자신이 살던 트랭방 지역에 폭격을 했던 조종사 존 플리머를 만나 “나는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플리머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신학공부를 하여 지금은 목회자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는 곳곳에서 분쟁과 다툼이 있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다르고 자신의 이기적 소유욕으로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거친 행동에서 나오는 폭력과 테러는 지금도 세계를 위협합니다. 이러한 분쟁의 세계에 킴 폭이 전한 “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복음을 전하여 서로 용서하며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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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노년을 사명으로 삽시다 | 2015-03-14 |
| 지미 카터는 미국 대통령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조지아 주 땅콩 농장주 출신으로 1977년에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1년까지 대통령 직을 수행했습니다. 대통령 시절 <도덕 정치>를 부르짖음으로 크리스챤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는 얻지 못했습니다. 재임 시절 캠프데이비드에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초청하여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중동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베긴 수상과 사다트 대통령이 1978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배후에서 중재역할을 한 지미 카터는 24년이 지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재임시절보다 퇴임 후의 활동이 더 활발했습니다. 그는 크고 작은 분쟁이 있는 곳이면 지구촌 어느 구석이라도 찾아가서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북한의 핵시설문제를 위하여 북한을 방문했고 보스니아 분쟁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99년엔 우간다와 수단의 평화협정을 중재했고 모잠비크와 동티모르 등지에선 선거감시단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 해비타트(Habitat)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방문하여 사랑의 집짓기를 하면서 목수로 땀을 흘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아무리 바쁘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더라도 주일이면 고향 조지아주 침례교회로 돌아와 주일학교 교사직을 충실하게 감당합니다. 지미 카터의 이러한 활동은 대통령 퇴임 후 그의 나이 56세부터 시작한 것으로 노년의 인생을 화려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의 노년의 삶은 제2의 인생의 삶으로 남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저서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이란 점점 확대되는 것이지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카터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에는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 것인가? 걱정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나이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우리의 주변에 눈을 돌리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6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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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말씀대로 사는 길 | 2015-03-07 |
| 51위그노(Huguenot)의 후예들 | 2015-02-08 |
위그노(Huguenot)의 후예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항거하는 사람들, 반항자)라고 불렀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위그노”(Huguenot-동맹 공동체의 사람들)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는 칼빈이 프랑스 사람이기에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칼빈주의 사람들입니다. 16세기 프랑스 왕들은 가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개신교 신자들을 심하게 핍박했고 집단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자들을 밀고하면 그들의 전 재산을 몰수 했습니다. 이때 밀고자에게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주는 법률까지 제정하여 조직적으로 개신교 신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결국 1562부터 1598년까지 36년간 프랑스에서 끔찍한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영국은 개신교를 지원했고 스페인은 가톨릭을 지원하므로 전쟁이 더욱 가열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개신교와 가톨릭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전쟁은 1598년 낭트칙령을 반포하면서 끝이 납니다. 36년간의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얻은 것은 예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얻은 프랑스 위그노의 예배의 자유는 루이 14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폐지됩니다. 1685년 루이14세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를 부르짖으면서 낭트칙령을 폐합니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조국을 버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됩니다. 당시 30만 명이나 되는 이들은 상공인들로 제철, 염료, 화학분야의 고도의 하이테크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특별 이민법을 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독일은 이들을 받아들여 공업 기술력을 향상시킵니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들은 서부개척의 총포와 화약분야의 권위자들이 됩니다. “위그노(Huguenot)”, 프랑스 개신교 신앙동맹공동체 사람들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술 분야의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을 보유한 실력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위그노의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이들이 피 흘려 쟁취한 예배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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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위그노(Huguenot)의 후예들(2) | 2015-02-15 |
지난주에 이어 위그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글을 씁니다.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자들을 우리는 “위그노” (Huguenot-동맹 공동체의 사람들)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개신교 칼빈주의 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등장으로 “낭트칙령”이 폐지되고 박해가 다시 시작되자 조국 프랑스를 버리고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영국, 미국 등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탈출을 감행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직업소명”을 믿는 자들로 기계, 제철, 염료, 화학, 모직 등 고도의 하이테크 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소기업인들이었습니다. 영국의 찰스 2세는 당시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던 위그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 이민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민법에 의하여 영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영국의 기계공업과 면방직 공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증기기관을 발전시켜 상용화 시킨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대표적인 위그노 출신입니다. 이러한 위그노 중심의 기술의 발전은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편 스위스로 들어간 위그노들은 제네바를 기점으로 하여 산속 마을인 샤프하우젠과 쥐라 지방에 정착하여 스위스 정밀산업인 시계산업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만든 시계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롤렉스, 오메가, 위블로, 예거르꿀뜨르, 파텍필립,등 명품시계 브랜드입니다. 지금도 500개의 시계회사에서 3만 명의 장인들이 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제네바 뒷골목에 소규모 은행을 열었는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거래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재산형성 과정과 예금액 등을 알 수 없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거래원칙이 오늘날의 2500조의 스위스 비밀은행이 된 것입니다. 유럽으로 흩어진 위그노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이라는 <직업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위그노가 믿던 칼빈주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위그노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직업소명>의 의미를 깨달아 열심과 충성을 다하면 각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위그노 신앙의 후예>답게 모든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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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스완슨 선교사를 부르신 하나님 | 2015-02-23 |
1952년 6.25 전쟁이 한참이던 겨울 어느 새벽에 서울 거리를 거닐던 미국인 선교사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은 길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치우는 인부들의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쟁 중에 아이들이 이렇게 죽어가는 서울 거리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스완슨 목사님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국의 어린이들을 돕자고 호소합니다. 그후 40년 동안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켐패션(Compassion)운동을 전개하여 미국 크리스찬의 후원으로 10만명의 한국의 전쟁고아와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끼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의 켐패션 운동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어린이에게 <꿈을 잃은 어린이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망을> 전하는 구호단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후원국이 미국, 영국,독일,캐나다,호주,프랑스,뉴질랜드,이탈리아,스위스,한국등 10개국이며 수혜국은 세계 26개 나라의 어린이 110만 명에게 5100개의 지역교회를 통하여 먹을 것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한국은 지난 2003년에 수혜국에서 후원국이 되었습니다. 컴패션의 비전은 빈곤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세계의 어린이들을 영적, 정서적, 사회적, 육체적, 그리고 감성적 빈곤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긍극적으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함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운영철학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중심(Christ-centered), 어린이 대상( Child-focused), 지역교회중심(Church-based) 재정의 투명성(Committed to Integrity)을 단체의 원칙으로 합니다. 스완슨 선교사 한사람의 시작이 이제는 세계 110만명의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켐패션 운동을 보면서 스완슨 선교사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큰 역사를 이루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켐패션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어린이를 돕기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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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 | 2014-06-15 |
6월은 나라를 사랑하는 달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며 6월6일은 현충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위하여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정치의 일선에 나서서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 자신의 맡은바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 그 외에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36년 동안에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나라사랑을 실천할 때 일본과 맞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또한 후진들을 양성하여 훗날을 기약하는 인재양성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나라를 사랑한 김약연 목사님은 함경도에서 만주로 온 집안이 이주하여 1908년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워 인재들을 양육했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의 이주 동기는 그의 글에 나타난 것처럼 “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주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당시 동명학교에서 새로운 신학문을 가르치려고 신학문을 배운 정재명 선생을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정재명 선생은 부임조건으로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칠 것과 학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재명 선생이 부임하면서 명동학교는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쳤고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동휘 선생이 이곳으로 오면서 기독교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가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무력 탄압 속에서도 만주의 교회는 성장하여 1921년에는 105곳의 교회가 있었고 교인이 6천3백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명학교 출신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 선생과 시인 윤동주 선생이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자신의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도 나라사랑의 방법입니다. 특히 훗날을 위하여 인재양성에 전심전력하는 것도 나라 사랑의 방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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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잔인한 4월을 보내면서 | 2014-04-27 |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온 국민이 아파하는 세월호의 침몰을 바라보면서 슬픔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 분노로 표출 되고, 욕설이 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광장에 나가 나쁜놈, 죽일놈, xx놈들 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목사라는 체면 때문이랍니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데. 바르지 못한 것에 동조하고 불의에 눈감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는데. 함석헌 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가 가슴에 메아리쳐 옵니다.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RMS Titanic)호는 첫 항해 중 빙산과 충돌하여 북대서양에 침몰하였습니다. 당시 1,514명이 사망하였고 구조된 사람은 710명 정도였습니다. 타이타닉 호의 선장은 존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배가 침몰할 때 마지막까지 조타키를 잡고 그대로 서 있다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스미스 선장의 고향 리치필드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의 동상 앞에는 “Be British(영국인답게 행동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선원들에게 마지막 한 말입니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은 죽음 앞에 비겁하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원들은 마지막까지 승객들의 구조에 열심을 내었고 선장의 지시에 의하여 어린이와 여자를 먼저 구멍보트에 태웠습니다. 이것은 바다의 법칙(the rule of the sea)이라 하여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승객들 먼저, 그리고 선원들이 내리고 마지막으로 선장이 배에서 내립니다. 이러한 전통은 해양인들의 시맨쉽(Seamanship)이 되었습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배에 놔두고 자신들만 살려고 탈출했으니 시맨쉽(Seamanship)을 저버린 비겁한 행동입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이 없는 황무지와 같은데 눈치 없는 봄은 대지에 비를 뿌리고, 라일락 꽃을 피우는 모습에 역설적으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꽃다운 아이들이 아직도 차가운 바다에 버려진 채 돌아올 소식이 없는데 창밖의 새들은 눈치 없이 노래하니 너무나 잔인한 4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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