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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보고 배우는 자녀들 | 2019-05-05 |
경상북도 안동의 하회(河回)마을은 1999년 4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 간 후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하회는 하천이 휘돌아가는 곳이라 하여 하회마을이라고 부릅니다. 하회마을은 600년간 이어오는 풍산 류씨의 집성촌입니다. 특히 조선 중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1542-1607)선생의 생가가 있습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했고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선조에게 천거하여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로 국방을 총괄하였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반대파의 탄핵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하회마을로 낙향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임진왜란 당시 자신이 겪은 일들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습니다. <징비록>은 시경에 나오는 구절<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여기징이비후환)>에서 따왔으며,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손에게 교훈을 남긴 수기형식의 책입니다. 징비록은 그 가치가 높이 평가 되어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징비록의 교훈은 유비무환(有備無患-미리 준비해 두면 근심 될 것이 없음)입니다. 생각해보면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평양까지 피난을 간 것은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을 미리 대비하여 힘을 기르지 못한 까닭입니다.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전쟁을 미리 대비 했다면 일본의 침략에도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500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 풍산 류씨편>이라는 책에서 징비록을 기록한 류성룡 선생의 글을 쓰는 선비정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명문가문에게 배운다, 9대째 공직은 이유가 있다, 평생 책 읽는 아이로 만들어라” 풍산 류씨의 가문은 아버지가 자녀들 앞에서 평생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자녀들이 책을 읽게 되었고 9대째 선비로 관직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평상시 부모의 행동이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자녀는 자연스럽게 부모의 모습을 보고 따라 합니다. 징비록을 기록한 류성룡 선생의 책 읽는 모습이 명문 가문을 이룬 것처럼,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부모의 신앙생활을 자녀들이 보고 배우는 것을 깨달아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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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아침에 눈을 뜨면 | 2019-04-28 |
얼마 전 소개했던 박목월 선생의 <아침에 눈을 뜨면>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시의 내용은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의 삶 속에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에 다짐을 하고 하루를 출발합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다짐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약한 인간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먹은 마음이 사흘 밖에 가지 않는다는 약한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새해 아침이 되면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겠다, 금연, 금주를 하겠다, 외국어 공부를 하겠다, 새벽기도를 하겠다, 전도를 하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크게 하지만, 3일도 못가 다짐했던 마음이 흐트러지고 실천을 하지 못한 약한 모습을 작심삼일이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 류성룡 선생이 도관찰사로 있을 때 하루는 행정 문서를 전달하는 역리를 불러 관할 고을에 발송할 공문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 일후 문서의 내용을 고쳐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서전달 역리를 불러 다시 고쳐 공문을 보내려하자 역리는 3일전 공문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왜 아직 발송하지 않았느냐고 담당 역리를 꾸짖으니 역리가 하는 말이 “언제나 다시 고치는 문서, 이번에는 기다렸다가 수정된 공문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이 일에 류성룡 선생은 크게 깨달아 공문을 보낼 때 몇 번이고 다시 보고 공문을 검토 한 후 보냈다고 합니다. 오늘도 <아침에 눈을 뜨면서> 착한 일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작심삼일 되지 않고 꾸준하게 언제나 한결 같은 실천을 하려고 오늘도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하나님은 날마다 금빛 수실로 찬란한 새벽을 수놓으시고 어둠에서 밝아오는 빛의 대문을 열어젖혀 우리의 하루를 마련해 주시는데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을 돕고 괴로운 이가 있으면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앓는 이가 있으면 찾아가 간호해 주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밝은 하루를 제게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착한 일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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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잔인한 4월, 부활의 희망 | 2019-04-21 |
1948년 노벨 문학상을 탄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Eliot)이 쓴 <황무지(The Waste Land–1922년 작품)>의 첫머리 제1부 The burial of the dead (죽은 자의 매장)에서 ‘잔인한 4월’(April is the cruelest month)로 표현되면서 4월을 잔인한 달로 말하기 시작 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시인 T.S 엘리엇(Eliot)이 4월을 잔인하다고 표현한 것은 역설(逆說)적인 표현입니다. 엘리엇이 <황무지(1922년)>를 쓸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이 없는 황무지 같은데 눈치 없는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대지에 비를 뿌리어 꽃을 피우고 희망을 속삭이니 잔인한 4월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희망의 계절 4월은 대지에 꽃을 피우고 새들은 봄을 노래하니, 황무지 같은 희망 없는 시대의 4월을 잔인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만물이 새롭게 움트는 봄, 파릇파릇 새싹이 무거운 흙덩이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봄입니다. 진달래, 개나라 꽃소식이 들리는 희망의 봄입니다. 하지만 2019년 우리의 봄은 매일 반복되는 재난문자로 잔인한 4월이 되었습니다. 강원도 산불, 미세먼지 등 <긴급재난문자>가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직 산불재난의 쓰레기 처리도 안 되었는데, 아픈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타다 남은 모퉁이에 소절 없이 푸릇푸릇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죽은 땅에 라일락을 키워내듯 산불로 잿더미가 된 대지에 실낱같은 생명력 하나로 뚫고 나오는 새싹을 보면서 우리는 잔인한 4월에도 희망을 품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사탄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다시 사신 날입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절망할 때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황무지의 대지에 비가 내리고 새싹이 나오는 잔인한 4월에 주님은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잔인한 4월, 희망의 부활,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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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잘못된 절기 - 사순절(四旬節 Lent) | 2019-04-14 |
사순절(四旬節 Lent )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나무가 타고 남은 검은 재를 이마에 발라 회개를 하는 날)부터 시작하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금요일까지 40일간 이어지는 금식과 고기를 먹지 않는 로마 가톨릭의 금욕 기간의 절기입니다. 특히 금식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 1주일간은 사육제(謝肉祭) 기간입니다. 앞으로 사순절을 지키는 40일간은 고기를 먹지 못하니 고기를 많이 먹어 두자는 의미의 축제로 사육제를 지킵니다. 사순절의 기간은 재의 수요일부터 성금요일까지 총 46일간 입니다. 주간으로 6주간이 됩니다. 사순절의 46일 중 6번의 주일날은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지켜야하기에 금욕이 중단됩니다. 정확하게 사순절은 40일이 아니라 46일입니다. 영어로 렌트(Lent)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본래 <봄>을 가리키는 lencten 혹은 Lenchthen 말로 <느리다, 길다>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완전한 금식으로 육식을 금했는데 13C부터는 간단한 식사가 허용되었고, 동방교회는 아직까지도 우유로 된 음식과 고기를 이 기간 중에 금지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절기와 예배 행위 중 형식적인 것은 절기와 예배순서에서 폐지했습니다. 종교개혁 때 사순절과 같은 형식적인 것은 폐지했습니다. 특히 칼빈은 사순절이 미신적으로 시행되고 공로를 세우며 금식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며 실행되었던 모든 것을 완전히 폐지하였습니다. 다만 금식하며 회개하는 기도들은 루터파 교회와 영국의 성공회에서 조금씩 허용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사순절을 교회절기로 슬그머니 받아들여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장로교는 지키지 않았던 미신적 절기인 사순절 절기를 비판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교회 절기를 지키면서 절기의 본래 뜻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잘못하여 형식과 외식에 치우치는 절기를 미신적으로 받아들여 지킨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개혁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 교단은 사순절을 잘못된 절기로 의결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의 40일 뿐 아니라 365일 1년 내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은혜를 생각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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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보트피플(Boat people) - 선상난민(船上難民) | 2019-04-07 |
1965년 미국이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월남전이 시작이 됩니다. 명분은 아시아에서 공산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10년간의 긴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처음엔 의료지원단을 보냈지만 1965년 10월에 청룡부대, 맹호부대를 파병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1973년 1월에 파리에서 휴전협정을 하고 미군은 전투주력부대를 철수시킵니다. 그러나 북쪽의 공산군은 미군의 전투부대가 철수하자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전쟁은 공산군이 승리를 합니다. 전쟁에 승리한 공산군은 사람들을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이공 함락 36시간 만에 26만 명을 처형하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끔찍한 처형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이공을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작정 배를 타고 사이공을 탈출하는 보트피플(boat people)은 1975년-1980년까지 100만 명에 이르렀고 바다에서 구조되지 못해 죽은 숫자가 14만 명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기위해 베트남을 탈출했지만 이들을 받아주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부산에 베트남 난민 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이슬람 무장단체 IS가 시리아에서 내전을 일으키면서 목숨을 위하여 무작정 유럽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시리아 난민은 대략 5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이웃나라 터키와 레바논에만 시리아 난민이 300백만 명이 넘습니다. 이중에 살 길을 찾아 유럽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은 무작정 배를 타고 지중해로 나옵니다. 이들을 우리는 보트피플, 선상난민(船上難民)이라고 부릅니다. 2018년 유엔난민기구(UNHCR)가 발표한 연간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자신의 의사에 반해 낯선 곳을 떠도는 사람의 수는 모두 6850만 명이다. 이중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 밖으로 내몰린 난민의 수는 2540만 명이며, 그 절반 이상은 만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제주에도 예멘 난민 500여명이 난민 신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에 감사해야합니다. 전쟁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위하여 무작정 배를 타는 보트피플들, 그리고 고향을 등지고 낯선 지역으로 떠도는 난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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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고난을 극복하는 신앙 | 2019-03-31 |
독일의 유명한 음악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일생동안 가난과 질병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술주정뱅이 테너 가수인 아버지와 하녀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과도한 음악공부를 강요받았습니다. 4세부터 골방에 가두어져 하루 종일 악기를 연주해야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천재성을 사람들에게 들어내어 돈벌이를 하려는 아버지 때문에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베토벤은 17세 때 어머니를 잃었고 28세에 음악가로 죽음과 다름없는 청각을 잃는 절망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32세에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에서 요양을 하던 중 자살을 생각하고 유서를 쓸 정도로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청각을 잃은 후 더 많은 작곡을 합니다. 1803년 오라토리오 <감람산상의 그리스도>, 1804년<제3교향곡영웅>, 1808년 <제5교향곡 운명> <제6교향곡 전원>, 그리고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1824년 <제9교향곡 합창>을 작곡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난을 겪게 됩니다.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살다간 사람일지라도 한 두 번의 고난의 시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 여부가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이 찾아오면 즉시 낙망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고난이 큰 자극이 되어 더 큰 소망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재적인 작곡가 베토벤은 28살에 청각을 잃는 고난의 상황이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작곡에 몰두하여 우리에게 희망의 음악을 선물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도 절망하거나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의 상황에도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2019년 추운 겨울이 지나고 이제 새봄이 되었습니다. 새봄에 우리도 소망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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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3.1운동 100주년, 자신을 돌아봅시다. | 2019-03-24 |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1902-1920/18년)열사의 유언입니다. 유관순은 1902년 천안시 병천면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서울의 이화학교에 입학합니다. 이화학교 고등과 1학년에 재학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납니다. 학교가 휴교를 하자 유관순 열사는 고향 아우네(병천)로 내려와 진천, 청주, 천안, 안성, 병천 등지의 교인들과 연락하여 4월1일 아우네 장날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칩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5월9일 공주법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2심은 서울에서 징역 3년 선고를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중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수차례 구타를 당했고 결국 1920년 9월28일 순국합니다. 나라를 위하여 순국하신 분들을 우리는 의사(義士) 또는 열사(烈士)라고 부릅니다. <의사>는 무력(武力)으로 항거하다 의롭게 죽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며 <열사>는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관순 열사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화학교 선교사 프라이(Lulu E. Frey)와 월터(Jeanette A. Walter)가 형무소에 찾아가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습니다. 이에 이화학교 선교사들이 유관순의 옥중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본 당국은 시체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감리교회에서 김종우 목사님이 장례식을 집례하여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습니다. 그 후 1936년 일제의 이태원 택지 조성 때 묘지를 무연고 묘지로 처리하여 지금은 무덤을 찾을 수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나는 지금 목숨을 바칠 만한 일에 열중하고 있는지요? 나에게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 있는 꿈이 있는지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즈음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생명을 바칠만한 꿈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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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2019-03-17 |
몇 주 전 <뜻을 전하는 아름다운 교제>라는 제목으로 청록파시인 박목월과 조지훈 시인의 교제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믿음을 가지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시 속에는 기독교 신앙이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박목월 선생의 믿음의 시를 하나 소개합니다. 믿음의 흙 - 박목월 - 제비는 진흙을 이겨 집을 짓는다. 진흙이 무엇을 뜻하는 것임을 모르고 알을 까기 위하여 그것을 이겨 집을 짓는 맹목적인 슬기, 진흙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누가 알랴 그것을 이겨 눈에 바르고, 보냄을 받은 실로암의 연못에서 씻음으로 장님은 눈을 뜬다. 심령의 눈 먼 자여, 영혼의 장님이여 안다는 그것으로 눈이 멀고, 보인다는 그것으로 보지 못하는 우린 아집 속에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게 하라. 진흙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제비는 둥우리를 마련하여 알을 까는 믿음.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보냄을 받은 실로암의 연못에서 눈을 씻자. 우리는 늘 어리석게도 눈이 멀어 진리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무지의 상태에서 아는 척하는 고집스러운 자기주장을 합니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에게 진흙을 발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9:7)하셨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제비가 진흙을 물어다 집을 짓는 것처럼 예수님의 진리의 진흙으로 우리의 무지와 아집의 눈을 뜨라고 합니다. 본다고 하면서 보지 못하고 안다고 하면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에 믿음의 진흙을 발라 우리 모두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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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강화도의 복음전파 | 2019-03-10 |
한국교회사 특강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강화도 교산교회 역사을 소개합니다. 교산교회 역사를 보면 1893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미국의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 선교사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존스 선교사는 1888년 21살의 나이로 제물포에 들어와 선교를 하다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라는 청년을 만납니다. 주막에서 술을 파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며 복음을 전하는 존스 선교사에게 큰 감명을 받은 이승환은 복음을 믿게 됩니다. 그 후 이승환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머니가 복음을 믿게 되자 이승환은 존스 선교사에게 연락하여 강화도에 와서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 부탁을 합니다. 존스 선교사는 즉시 배를 타고 강화도 교산리로 갔습니다. 그러나 지역의 양반들이 서양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여 마을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이승환은 지역주민 몰래 밤에 아픈 어머니를 업고 배로 가서 배위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후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것이 강화도 교산교회(1893년)가 됩니다. 교산리에 서양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 중에 김상임이라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양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이승환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또 선교사들이 전해준 한문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난후 자신의 토지와 집을 교회에 헌금하여 교회당을 세울 뿐 아니라 강화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 후 강화도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홍의교회(1896),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입니다. 그 가운데 홍의교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우리는 한 날 한 시에, 함께 믿어, 한 형제가 되었으니 한 일(一) 자로 돌림자를 쓰자고 하여 애(愛), 신(信), 능(能), 순(純), 충(忠), 봉(奉), 은(恩), 경(敬)으로 이름을 바꾸고 일(一)의 돌림자를 쓰게 됩니다. 그 가운데 홍순일은 자신에게 돈을 꾸어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면서 예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고 간증했습니다. 강화도의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았으니 오늘은 일산에 내일은 세계로 달려가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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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유여대 목사와 의주의 3.1운동 | 2019-03-03 |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중 한 사람인 유여대(劉如大1878-1937) 목사님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젊은 시절 한학을 익혀 서당의 훈장으로 일하던 중 1898년 휘트모어(Whittemore)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의주동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하다 1915년 제8회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의주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이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한 것처럼 목사님도 의주에서 일신학교(日新學校)와 여학교인 양실학원(養實學院)을 세워 인재들을 양성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할 때 평안도 선천읍 교회의 양전백 목사 집에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을 하게 됩니다. 3월1일 당일 서울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독자적으로 의주에서 3.1운동을 하겠다고 하여 서울로 가지 않았습니다. 의주로 돌아온 목사님은 주변사람들에게 은밀히 알려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합니다. 드디어 3월 1일 자신이 섬기던 교회 앞 공터에서 교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 등 800여명 모였습니다. 순서는 (1) 찬미가 (2)기도 (3)연설 (4)독립선언서 낭독 (5)독립 창가 합창 (6)만세 (7)의주성 행진으로 진행했습니다. 오후에 점점 시민들이 합세하여 2000명이 행진을 했고 다음날에는 3000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유여대 목사님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1년 11월6일 <동아일보>는 유여대 목사님의 출옥 소식을 기사로 남겼습니다. 출옥 소감을 물을 때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해보니 더욱 자유(自由)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졌고 앞으로 시간을 두고 우리는 정의(正義), 인도(人道)에 힘쓸 것이라고 했습니다.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1919년 당시 기독교 인구는 적은 숫자였으나 일제의 폭압 앞에 항거했고 대한독립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독교인의 숫자는 다수가 되었으나 시대를 이끌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각자 하나님 앞에 철저한 회개와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므로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욥기 3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