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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경건한 침목 | 2018-10-14 |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1379~1471)는 1379년 독일의 쾰른 부근 켐펜에서 가난한 공장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토마스 하메르켄(Thomas Hemerken)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보내던 중 19살에 성직자가 되겠다고 서원하여 <공동생활 형제단>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경건 위하여 고전 읽기와 기도생활에 전념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92살까지 살면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고독 속에 홀로앉아 침묵으로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알려지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라는 작품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묵상되는 책입니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침묵>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경건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세미하기 때문에 <조용한 침묵> 없이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조용한 환경>을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오후1시부터 30분만 침묵하자고 했습니다. 몇몇 분들은 조용히 앉아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과 교제하며 세상일에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여전히 수다스러운 말을 하며 침묵하지 못했습니다. 주일에 단 30분을 침묵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경건을 연습하는 일, 성경을 읽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왜 그리도 분주하십니까? 무엇이 그리도 우리를 수다스럽게 만듭니까? 무엇이 우리를 단 몇 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조용한 환경을 만들지 못하게 합니까? 왜 우리는 고독 속에 홀로앉아 침묵한 채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유익하고 달콤한 영혼의 상쾌함을 즐기지 못하는지요? 우리는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며 수다 떠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침묵의 시간에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수다스러움을 멈추고 분주함을 뒤로하고 주님과 교제해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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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소망의 복음 | 2018-10-07 |
우리나라 자살 통계를 보면 2017년 사망자 수는 12,463명으로 전년 대비 629명(-4.8%) 감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1일 평균 자살사망자 수는 34.1명입니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은 24.3명으로 전년 대비 1.3명(-5.0%) 감소하였습니다. 연령별 자살률을 살펴보면 전년 대비 모든 연령에서 감소하였으며, 특히 60세 이상이 가장 많이 감소했고 10대의 자살도 많이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11.2명보다 높은 수치입니다. 최근 최고치를 기록한 2011년도에는 15,906 명으로 31.7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 후 통계수치로 계속 낮아지고 있습니다. 월별 통계로 보면 5월이 가장 높았고 1월과 12월이 낮았습니다. 또한 자살 동기는 가정문제 (1,162명-8.9%)경제문제(2,043명-23.4%) 남녀문제(429명-3.3%) 육체적 질병 문제(2,768명 ?21.3%)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이처럼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날까? 일반적으로 세상사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자살한 사람을 입장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오죽했으면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했을까하며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존엄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누구든지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스스로 생명을 끊은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루 평균 34.1명이 자살하는 현실 앞에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더욱 큽니다. 절망하여 극단으로 방법으로 생명을 끊으려는 이웃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교회가 감당해야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절망한 이웃에게 다가가 소망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모두 절망한 이웃에게 소망을 전하는 전도자가 됩시다.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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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광야 같은 인생 길 | 2018-09-30 |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면 남쪽 지역의 광야 길을 가게 됩니다. 버스로 몇 시간을 달려도 산에는 나무가 없고 풀 한포기 자리지 않는 사막지역입니다. 버스를 타고 관광을 하는 사람들은 몹시 지루해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몹시 의미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광야”입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바다를 건너 광야 길로 들어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표현합니다. 미드바르는 <다바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드비르>라는 지성소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즉 광야의 깊은 뜻은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광야는 출애굽 때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르친 곳입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하여 밤에는 춥고 낮에는 무더운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하나님의 큰 능력의 장소입니다. 이러한 광야 길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성경은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8:4)라고 기록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미쉬나> 에는 광야 40년을 “하나님과의 허니문 기간”으로 표현합니다. 신혼부부의 행복한 시간처럼 광야 40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보호하며 말씀하시며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신 곳입니다. 목이 마를 때 모세를 통하여 반석을 쳐서 물을 주시고, 먹을 음식이 없을 때 하늘에게 만나를 주시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를 주신 곳이 광야입니다. 이러한 광야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 주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광야”에 홀로 서서 고독함을 느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기적을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광야를 통하여 우리는 큰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덥고,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프고 고달픈 광야 같은 인생 여정 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나, 샘물,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광야 같은 인생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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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2018-09-23 |
윤동주(尹東柱, 1917-1945)시인은 독립 운동가이며 기독교 민족 시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만주의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 숭실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중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8살의 젊은 나이에 옥사 했습니다. 그가 쓴 “별 헤는 밤”, “참회록”, “십자가”, “서시”등 여러 편의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서시(序詩)>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라는 그의 유고집에 실려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내용 보면 ‘하늘-부끄럼’, ‘바람-괴로움’, ‘별-사랑’을 중심으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자아성찰과 바르게 살려는 의지, 그리고 절망적 현실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보게 됩니다. 윤동주 시인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의 명동촌은 어려운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몸부림친 김약연 목사의 이상촌입니다. 명동학교를 세운 김약연 선생은 윤동주의 외숙부입니다. 외숙부가 세운 기독교 공동체인 명동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공부하며 자란 윤동주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서시>의 마지막 부분의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말은 당시 일제 강점기 민족적 절망의 상황에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2018년 한가위 추석의 연휴를 보내며 나에게 주어진 길이 어떤 길인가? 잠시 생각해보며 “나에게 주어진 길”을 후회 없이 걸어가겠다는 다짐도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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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죠지 뮬러의 기도 | 2018-09-16 |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1805년 프로이센(독일) 왕국의 크로펜스태트에서 태어나 1898년 9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동안 5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죠지 뮬러는 청소년 시절에 도박, 도둑질,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1824년 19살 되던 해 아버지의 권유로 할레대학의 신학부에 입학을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나이 20살 때 친구의 권유로 경건한 성경연구모임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한 경건한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죠지 뮬러는 그날 저녁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강권적 회심을 경험합니다. 당시 그가 다시던 할레 대학은 17세기 독일 경건운동을 일으킨 헤르만 프랑케(A. Hernmann Francke 1663-1727)가 활동한 대학입니다. 프랑케의 경건운동은 회심 운동인데 프랑케의 회심운동을 3가지로 요약하면 1) 루터가 강조한 회심은 인간이 자신의 잘못으로부터의 스스로 뉘우치는 자기반성이 아니라 근원적 무신론자의 회심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회심이다 2) 회심은 논리적 표현이 아니라 온 인격적 정서적 체험이다 3) 하나님에 대한 회심의 체험은 삶으로 나타나며 이웃에 대한 봉사로 표현 된다. 당시 독일 경건주의는 회심 후 삶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죠지 뮬러는 이러한 전통의 할레대학 재학 중에 회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할레 대학을 졸업한 후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영국으로 갑니다. 그는 영국의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평생 15만 명의 고아들에게 희망을 주었기에 <고아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평생 고아들을 돌보면서 영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부자들에게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에 대하여 “ 기도는 시작으로 부족하다. 계속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믿음으로 간청해야 된다.” 우리도 낙심하지 말고 이 땅에 복음의 회복을 교회의 개혁을 그리고 우리의 경건회복을 위하여 응답될 때까지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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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장애물 경기 | 2018-09-09 |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8.18-9.2)에서 우리나라 금(49) 은(58) 동(70) 으로 종합 2위를 했습니다. 그 가운데 100M 여자 허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정혜림 선수가 있습니다. 한국나이로 32살에 금메달을 탔습니다. 육상선수 32살이면 포기하고 은퇴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정혜림 선수는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한 결과 금메달을 났습니다. 허들 경기는 100M를 달리는 중에 허들(장애물)을 10개를 설치하고 뛰어 넘는 경기입니다. 허들 경기는 트랙에서 앞 만 보고 달리는 100M 경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반드시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합니다. 10개의 장애물을 뛰어 넘지 않고 옆으로 달리면 실격이 됩니다. 물론 뛰어 넘다가 부딪치는 것은 허용이 됩니다. 육상 경기의 허들(장애물)경기는 마치 우리 인생의 삶과 같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삶을 살다보면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어떻게 하든 장애물을 극복해야 성공적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 낚시 초보인 젊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낚시터에 수초가 많아 낚시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이때 초보 낚시꾼이 너무 수초가 방해가 된다고 물속에 들어가서 수초를 다 잘라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나이든 노련한 낚시꾼이 말하길 젊은이 수초가 없으면 환경이 나빠져 고기들의 개체가 줄어들고 결국 우리가 낚시를 못 한다네 수초는 낚시의 방해물이 아니라 우리가 낚시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고기들의 집이라네 그러니 낚시꾼은 수초를 피하여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낚시의 장애물이 수초이지만 수초가 없으면 고기들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의 길에도 장애물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장애물은 우리를 더욱 빛나게 하며 도전하게 하는 열정을 가져다줍니다. 내 앞에 장애물이 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장애물을 도전하여 극복하는 멋진 인생을 삽시다.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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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다산이 혼자 웃는 이유 | 2018-08-19 |
다산(茶山) 정약용( 1762-1836) 선생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습니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라는 시를 쓸 정도였습니다. 23살 이벽 선생을 만나 서양학문을 소개받고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한다)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31살에 수원성을 축조하는 업적을 남기며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형조참의(검찰총장)가 됩니다. 그러나 정조 대왕이 죽자 그는 반대파에 의하여 유배를 갑니다. 40살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간 다산은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생활 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을 쓰기 시작하여 유배지에서 돌아온 그는 74세에 죽기까지 500여권 책을 집필하는 방대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가 유배지에서 쓴 독소( 獨笑 -혼자 웃는다)라는 시조가 있습니다. 有粟無人食 (유속무인식)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 (다남필환기)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達官必?愚 (달관필준우)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才者無所施 (재자무소시)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고. 家室少完福 (가실소완복)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지도상릉지) 도는 늘 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翁嗇子每蕩 (옹색자매탕)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婦慧郞必癡(부혜랑필치)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고. 月滿頻値雲 (월만빈치운)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 (화개풍오지)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物物盡如此 (물물진여차)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 (독소무인지)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인간은 행복의 조건을 다 가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초월한 모습으로 혼자 웃는 다산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가끔 소유에 대한 행복의 조건을 초월하여 혼자 웃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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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인의 선발대 | 2018-07-22 |
1892년 1월 미국 남장로회는 남자 선교사 3인 (테이트, 레이 놀즈, 전킨) 여성 4인 (테이트 선교사의 여동생 매티, 레이놀즈 아내 볼링, 전킨의 아내 레이번, 데이비스 양)으로 구성된 7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7인의 선발대라고 부릅니다. 1892년 11월 인천에 도착한 이들은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남장로회의 7인의 선발대는 1895년 2월 전주의 완산동 은송리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호남지역의 선교를 시작합니다. 수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 1897년 7월 드디어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호남 최초 5인에게 세례를 줍니다. 5인중 한 사람인 김창국은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에서 공부한 후 제3회 졸업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호남지역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군산에 있는 영명학교(永明學校)와 금산에 있는 심광학교(心光學校)에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 선생은 심광학교 재직 중에 그가 가르친 제자입니다. 김창국 목사님은 익산지역에서의 활동과 제주도에서 6년간 복음 전도, 그리고 광주의 양림교회에서 25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김창국 목사님의 장남 김현정(金顯晶)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어 일생 목회자로 살았고 차남 김현승(金顯承)씨는 숭실대, 조선대 교수였던 시인입니다. 그가 쓴 시 “가을의 기도”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시입니다. 3남 김현택(金顯擇)씨는 전주 신흥학교 2회 졸업생으로 전북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4남 김현구(金顯求)씨는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았습니다. 미국 남장로회의 7인의 선발대의 선교의 열정과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는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학교, 전주예수병원, 광주의 숭일학교, 수피아 여고, 목포의 정명, 영흥, 순천의 매산학교, 여수의 나병환자들을 위한 애양원등의 병원설립과 학교를 세웠고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낯선 땅 조선에 온 7인의 선발대 그리고 이어 들어온 유진벨, 오웬, 포사이드, 서서평, 잉골드 선교사들 선교활동은 오늘의 호남지역의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호남의 근대화 역사 속에 활동한 선교사님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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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불꽃 인생 | 2018-07-01 |
우리에게 프랑스의 신학과 과학과 수학자로 알려진 파스칼(1623-1662년)은 그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인간을 표현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은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이성을 가지고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스칼 하면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말입니다. 파스칼은 어린 시절 수학의 천재로 주변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로 수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삼각형에 대한 파스칼의 원리는 13세 때 발견하여 16세 때 원리를 발표했고 19세 때 최초로 계산기를 발명할 정도로 수학에 큰 업적을 남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학자보다는 우리에게 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수학자보다 신학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가 남긴 “팡세”라는 작품 때문입니다. 팡세(Pensees-생각)는 그가 살아있을 때 글을 써서 제목을 붙인 작품이 아닙니다. 팡세는 그가 죽은 뒤 유족들이 파스칼의 팡세(생각)라는 제목으로 그의 글을 모아서 발표한 것입니다. 천재의 수학자가 어떻게 하여 신학자로 더 많이 알려졌는가? 그것은 1654년 11월 마차 사고이후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차를 타고가다 큰 사고를 당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그는 사고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됩니다. 파스칼은 그날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잊지 않으려고 양복 안쪽에 프랑스어로 “Feu"-(불-Fire)라고 써서 지니고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다하여 이렇게 한 것입니다. 불꽃처럼 남은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 후 파스칼은 불꽃처럼 열정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한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의 친구들은 그가 사고로 뇌손상을 당해서 이상해 졌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불꽃같이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명을 위하여 불꽃처럼 열정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불꽃같은 열정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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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한 알의 밀알 | 2018-06-17 |
로버트 토마스 (Robert J Thomas 1840-1866) 선교사는 개신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토마스는 1840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3년 런던 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후 고향 교회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 죽자 큰 슬픔에 잠겨 그는 선교사를 사직하고 청나라 해상세관에 통역관으로 취직합니다. 세관의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그는 조선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수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부터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선교의 관심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린 것입니다. 1865년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해 중국을 떠나 서해안 자자리(紫羅里)에 와서 2개월간 한국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어느 정도 한국어를 구사할 때 즈음 그는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의 통역관과 <성서공회 파견원>의 자격으로 승선하여 평양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가 탄 셔먼호가 입항하려다 주민들과 마찰이 일어나 배가 불타게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는 9월2일 현장에서 순교합니다. 그가 중국을 떠나면서 마지막 보고한 선교 보고서에는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갑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을 생각하며 희망에 차 있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오면 환영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는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대동강에서 순교합니다. 그는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고 온 한문성경을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성경을 받아본 박춘권은 훗날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설립했고 그가 전한 성경책을 뜯어 벽지를 바른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 온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