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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지조론 | 2019-02-17 |
청록파 시인 박목월 선생과 조지훈 선생의 아름다운 교제에 대하여 글을 쓰고 지난 주일 박목월 선생의 <아침에 눈을 뜨면>이라는 시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志操論)>을 소개하려합니다. 1960년 6.25 전쟁으로 우리사회는 이념 갈등이 심화되고,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당시 집권당이던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 연장에만 혈안이 되어 백성들의 아픔과 고난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때 1960년 3월 조지훈 선생이 <새벽지>에 “지조론”을 발표합니다. 지조론은 당시 친일파 사람들이 과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뉘우침 없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어른 행세를 하는 모습에 대하여 모름지기 지도자들은 최소한의 지조를 가지고 백성 앞에 서야할 것을 강조한 글입니다. 본래의 제목의 “지조론은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지조를 지키는 것과 변절자에 대한 구체적 예를 들어 쓴 수필형식입니다. 서론에 지조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합니다. “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반대로 변절자에 대하여서는 “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것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정치인의 변절을 욕할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써 주를 향한 믿음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매 순간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사는 신앙의 변절자인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죽기까지 주님이 가는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던(눅22:33) 베드로의 변절이 오늘의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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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아침에 눈을 뜨면 | 2019-02-10 |
아침에 눈을 뜨면 - 박목월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하나님은 날마다 금빛 수실로 찬란한 새벽을 수놓으시고 어둠에서 밝아오는 빛의 대문을 열어젖혀 우리의 하루를 마련해 주시는데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을 돕고 괴로운 이가 있으면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앓는 이가 있으면 찾아가 간호해 주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밝은 하루를 제게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착한 일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빛같이 신선하고 빛과 같이 밝은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다정한,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고 내가 있음으로 주위가 좀 더 환해지는, 살며시 친구 손을 꼭 쥐어주는, 세상에 어려움이 한 두 가지랴. 사는 것이 온통 어려움인데 세상에 괴로움이 좀 많으랴. 사는 것이 온통 괴로움인데, 그럴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면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서로가 돕고 산다면 보살피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산다면 오늘 하루가 왜 괴로우랴.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과 정다운 눈이 정다운 눈과 건너보고 마주보고 바라보고 산다면, 아침마다 동트는 새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어려운 일 돕고 살자, 마음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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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뜻을 전하는 아름다운 교제 | 2019-02-03 |
우리에게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목월(1916-1978) 선생은 고향이 경주입니다. 그의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는 기독교 가정입니다. 모태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박목월 선생은 그의 시 속에 기독교 신앙을 많이 표현합니다. 일제 말기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에서 교수를 하셨고 문리대 학장을 지냈습니다. 국민 동요로 알려진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는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고 찬양한 동시입니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더불어 <청록집>을 출간하므로 청록파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지조(志操)론으로 잘려진 조지훈 선생과는 아주 깊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어느날 조지훈 선생이 경주를 방문한 후 돌아가〈완화삼(玩花衫>(꽃무늬 옷(적삼), 즉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이란 시를 써서 조지훈 선생에게 보냅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 구름 흘러가는 / 물길은 칠백리(七百里) /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 꽃은 지리라 / 다정하고 한(恨) 많음도 병인 양하여 /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박목월 선생은 여기에 〈나그네〉로 화답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이는 박목월 선생이 4살 위이지만 두 분은 친구가 되어 이처럼 멋진 시를 써서 서로의 마음을 전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친구의 교제입니까? 또한 품격이 있는 멋진 교제입니다. 설날이 다가옵니다. 설날에 고향의 친구들과 아름다운 만남, 대화 그리고 뜻을 전하는 동행의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조지훈 선생의 “완화삼”과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와 같은 서로의 뜻을 전하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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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순결한 교회, 덜 순결한 교회 | 2019-01-27 |
참된교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로 157번길 59에 집회장소를 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단 소속은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입니다. 장로교 제도를 따르는 조직체입니다. 세계인구 70억 인구 중 그리스도교 24억, 그 중 장로교는 1천8백만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교파입니다. 퍼센트로 보면 0.8%입니다. 1%도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성경 66권을 믿으며, 총33장으로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에서 교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교회는 (1)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天上)교회와 (2) 눈에 보이는 지상(地上)교회가 있습니다. 천상교회는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성도들의 총집합이며 완전한 교회입니다. 반면 지상교회는 전 세계에 걸쳐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조금은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Head)로 하는 지체들의 모임이며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하나님의 집이며 그 집의 사람들입니다. 지상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의 교리를 얼마나 순수하게 가르치고 받아들이며, 성례를 시행하며 공적 예배를 집행하느냐에 따라 순결하고 덜 순결한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교회일지라도 혼합과 오류의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중에 일부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가 될 만큼 타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상 교회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우리 참된교회는 일산동구 중산동에 근거를 둔 지상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순결할 수도 있고 덜 순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탄의 역사가 작용하는 타락한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세상의 원리를 가만히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교회의 순결을 훼손하는 주장들과 싸워야하고 최후 승리를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참된교회는 장로교제도를 따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최종 판단은 성경 말씀으로 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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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말씀에 복종하는 행복 | 2019-01-20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 1945)는 독일 루터교단의 목사로 반 나치운동가로 히틀러 암살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1945년 4월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하여 모두 다 긍정하지는 않지만 그가 히틀러의 나치운동에 대하여 반대하며 항거하는 저항정신과 고난에 동참하는 실천적 신앙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독일에서 박해가 심할 때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 교수 라인홀드 리버가 교수자리를 마련하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본회퍼 독일국민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고 하면서 망명을 거절하고 독일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교회의 신앙에 대하여 <값싼 은혜>라는 용어로 비판합니다. 당시 독일교회의 신앙을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 되었고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이 되었음을 본회퍼 목사는 지적합니다. 그의 신앙을 2단어로 요약한다면 “복종”과 “저항”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감옥에 <옥중서신>을 썼고 많은 기도문을 남기었습니다. 여러 기도문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지만, /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 자유롭게, 다정하게, 맑게, /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처럼, / 간수들과 대화한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한다. ---/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 내가 누구이건, / 아! 하나님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2019년 새해 아침 우리는 한 번 쯤 자신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얼마나 주님 명령에 복종했는가?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목숨을 버린 본 히퍼만큼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지는 못할찌라도 주님의 말씀에 작은 복종이라도 하겠다는 용기 있는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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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우물 안 개구리 | 2019-01-13 |
고사성어중 정중지와(井中之蛙-우물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중국의 장자(莊子)의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 할 수 없다(井蛙不可以語海). 그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拘於虛也). 여름에만 사는 곤충에게는 얼음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夏蟲不可以語氷). 그 곤충은 여름이라는 시간만 고집하기 때문이다(篤於時也)” 우리는 좁은 우물 속에 앉아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믿고 있는 개구리처럼 지식이 부족하고 무지한 사람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헤어지면서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고 하니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일에 대하여 계속 물어봅니다. 내일에 대하여 메뚜기가 아무리 쉬운 말로 말해줘도 하루살이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마도 평생을 말해도 내일에 대하여 하루살이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왜야하면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다가 죽기 때문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어찌 바다를 말하며, 하루살이에게 어찌 내일을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 이처럼 자신이 경험한 세계의 한도 내에서 말하며 깨달은 범위 안에서 행동합니다. 결국 인간은 눈에 비치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고집스럽게 자기를 주장하며 무지(無知)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억새풀의 사투리인 으악새를 새라고 주장하며, 한국인 신생아 엉덩이에 나는 푸른 반점인 몽고반점을 중국집이라고 고집하고, 붕어빵 안에는 붕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편견(偏見)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높고, 깊은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이해하고 긍정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일을 모르는 하루살이처럼 편견에 사로 잡혀 자기주장만 하지 말고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전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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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뻔뻔하게 찾아온 2019년 | 2019-01-06 |
1년은 365일, 시간으로 환산하면 8,760시간, 525,600분, 31,536,00초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계산할 때 몇 년이나 내 인생의 시간이 남았을까? 모세는 시90편에서 강건하면 80년이라 했는데 아무리 길어도 100년입니다. 누구나 정해진 인생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누구도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2018년이 지나갔고 2019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이성부 시인 말처럼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그리고 눈부시게 우리를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철부지 어린 아기가 출근하는 아빠의 바지 잡고 보채며 현관문을 막아 보지만 아빠는 매정하게 출근길을 서두르는 것처럼 그렇게 가지 말라 애원했건만 2018년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 손 벌려 오는 길 막았지만 2019년은 우리를 찾아 왔습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았고 기다리지 않았던 2019년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우리 마음을 비집고 찾아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뻔뻔한 2019년을 어떻게 할까?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손님이라면 8,760시간 그와 함께 배를 타고 항해해야 한다면 미워하지 말고 마음을 고쳐먹고 아름다운 동행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나누어 구분을 합니다. 크로노스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의 개념으로 흘러가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말합니다. 즉 달력에 정해진 시간을 말합니다. 내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갑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기간을 크로노스라 합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내 시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았어도 우리 곁에 비집고 찾아와 자리를 잡은 뻔뻔한 2019년의 시간을 우리는 크로노스(Chronos)로 흘려보내지 말고, 내게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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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18년을 보내면서 | 2018-12-30 |
거센 파도로 살고 싶다 -용해원 내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른다 살아 있는 사자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솟구치는 피의 몸부림처럼 젊은 영혼에 갈등이 휘몰아쳐 온다 둘러보아라 둘러보아라 세상이 무엇을 주던가 언제나 그대로가 아닌가 우리가 아우성쳐도 우리가 발버둥쳐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두가 잊고 만다 내 가슴에 뜨겁게 흐르는 피의 열정으로 오늘을 살겠다 한바탕 춤사위로 솟구쳤다 몰아쳐오는 바람처럼 거센 폭풍우처럼 한동안만이라도 뜨거운 열정으로 살고 싶다 용혜원 시인은 목사님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작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 거센 파도로 살고 싶다>는 열정 없이 사는 현대인들에게 거센 파도처럼 열정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시입니다. 오늘은 2018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벌써 한해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2019년이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2018년 열정의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이제 단 하루라도 거센 파도처럼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열정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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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예배하는 성탄절 | 2018-12-23 |
12월25일은 예수님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은 로마시대에 동지(冬至)를 기준으로 태양신을 섬기던 날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시대부터 12월25일에 대한 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계속 반대를 하니 결국 431년 에베소회의 때 12월25일을 성탄절로 1월6일을 현현일로 선포합니다. 최초의 기록은 로마의 필로칼루스가 만든 달력 <354년 코데스 달력>에 12월25일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나신 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성탄절 날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카톨릭은 12월25일, 아르메니아 교회는 1월6일, 이집트 콥트교회, 러시아 정교회, 세르비아 교회는 1월7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성탄절을 지키는 행사 역시 처음에는 그날만 지키던 것을 중세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마음에 준비하는 4주간의 대림절(강림절(Advent-11월 마지막 주일부터)로 발전하게 되었고 기쁨의 성탄축하를 한다는 명분아래 점점 세속의 상업성이 들어와 화려해진 성탄절 행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크리스마스이브의 성탄 전야는 크리스마스 이브닝(Evening/저녁)의 준말로 다른 날보다 더 조용히 거룩하게 가족끼리 성탄을 기다리는 날이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이교에서 온 절기이며, 세속적으로 화려해진 성탄절을 지키지 말자하여 1647년 영국 의회에서 성탄절을 완전히 금지시켰던 때도 있었습니다. 초기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역시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초기 선교사들이 성탄절을 지켰습니다. 독립신문 1896년 12월 24일 기사에 “내일은 그리스도 탄생일”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1900년 와서 성탄절에 교회에서 지역 주민들을 초청하여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성탄절 선물을 받으려고 1년에 한차례 교회를 나왔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상인들의 상업적 전술이 교회에 들어와 성탄절 선물과 카드를 서로 주고받는 행사들이 많아지고 성탄 트리와 점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성탄절은 크리스마스로 Christ(크라이스트/그리스도)+mass(미사/예배)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2018년 성탄절은 아기예수로 오신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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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나무를 가꾸는 사람들 | 2018-12-16 |
오래 전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란 칼럼에서 장 지오노의 이야기, 천리포 수목원, 남이섬 이야기, 전남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소개했습니다. 내용을 다시 한 번 소개하면,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은 아주 짧은 단편소설입니다.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1913년부터 해발 1,200M -1,300M 프랑스 프로방스 고산지대 황무지에 매일 도토리 100개를 심습니다. 아무 말 없이 홀로 3년 동안 10만개를 심었습니다. 주인공은 52세부터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37년 만인 89세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심은 나무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의 큰 숲이 되었습니다. 충남 태안반도 끝자락 천리포에 우리나라 최초 사립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은 1946년 연합군 중위로 한국에 처음 오게 된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1921- 2002 /민병갈(閔丙渴-한국귀화)가 1962년 17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1970년부터 40년 동안 나무와 식물을 가꾸어 13,200여 종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천리포 수목원을 이룬 민병갈 선생과 형제처럼 지낸 민병도 선생 역시 남이섬에 나무를 심어 오늘의 아름다운 남이섬을 만들었습니다. 전남 장성군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조성한 춘원 임종국 선생은 1956년부터 76년까지 20여 년간을 헐벗은 산 570㏊에 28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오늘의 편백나무 숲을 만들었습니다. 제주도 한림농원은 1971년 송봉규 선생이 황무지의 모래땅을 매입하여 오늘의 한림농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수목원의 숲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작은 일이었지만 20년, 3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숲을 이루고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는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복음운동의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교회를 처음 개척할 때는 어느 교회든 작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큰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 참된 교회도 시작은 작았지만 이제 부흥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이제 부터입니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 결 같이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나무를 가꾸어 갑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교회공동체를 세워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