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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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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다시 믿음으로 2025-07-27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사실 이 말은 믿음의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상 ‘믿음’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믿음에 관해서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에서는 믿음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그 존재가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믿음에는 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믿음은 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 즉 ‘상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나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떠한 상급보다 더 큰 상이 되십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큰 상이 되시고, 전부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부가 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비의 이야기는 이러한 믿음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였습니다.
믿음은 ‘일부’가 아닌 ‘전부’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란 조건이 아닌, 전부를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는 부르짖음에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524다시 은혜로 2025-07-20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형성된 문화 양식이나 생활 또는 사고 방식’을 가리켜 ‘전통’ 이라 말합니다. 반면에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이지만 낡아서 고치거나 버려야 할 것’을 가리켜 ‘인습’ 이라 부릅니다.
비단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가운데도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신앙적 ‘전통’에 관한 논쟁이 끊임없이 따라 다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고수하는 ‘전통’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막7:24-30)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목숨처럼 따르는 ‘장로들의 전통’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이 전통에 따르면 제자들의 행위는 ‘더럽고’, ‘부정한’ 것입니다. 또한 동일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 또한 ‘더럽고, 부정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와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들과 같은 선택받은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에게는 그러한 사람들의 편견 따위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어린 딸이 귀신 들려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살리려는 엄마에게 있어서 그런 편견이나 전통은 전혀 중요치 않았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 알면서도,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주님도 그런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당연한 은혜란 없습니다. 처음부터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발 아래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523다시 남은 자로 2025-07-13
‘남은 자’ 사상은 성경,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구약시대 노아 가족과 같이 홍수 심판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남은 자’ 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성경은 이사야입니다. 당시 유다의 상황은 정치, 종교, 도덕적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읍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심판을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심판하고 황폐하게 된 이후에 아주 작은 희망의 씨앗을 남겨 두셨습니다. ‘남은 그루터기에 피어날 새순’에 대해서 이사야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름 아닌 ‘이새의 줄기’(사11:1)에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방편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은 자’ 사상은 열왕기상 19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셨던 말씀 중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명을 남기셨다’, 즉 ‘칠천명의 남은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들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만 무릎 꿇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그 분께만 기도하는 사람들이 ‘남은 자’ 였습니다. 오직 혼자 남은 줄로만 알았던 엘리야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라, 너와 같은 칠천명의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때론 스스로 ‘혼자’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열심히 달려 왔지만, 정작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이러할 때 여러분 가까이에 ‘무릎으로 사는 남은 자’, 곧 ‘기도의 동역자’가 되어줄 사람이 있으신가요.
결국 우리는 서로를 위한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522요나단의 비전으로 다윗을 세우는 교회 2025-07-06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 돌아오면 항상 기다리던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개최된 여름성경학교였습니다.
전도사님이 전해주신 말씀을 듣고, 선생님과 함께 공과 공부를 하며, 친구들과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뛰어놀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시대의 다윗을 세우는 공동체’ 의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바로 이번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통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온 교회가 같이 기도하며, 응원과 후원으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2025년 참된교회 여름성경학교 및 수련회)

- 영유아 ? 유치부 여름성경학교 – 주제: 나는 하나님을 예배해요!(롬12:1)
기간: 7월 19일(토) ~ 7월 20일(주일), 장소: 참된교회

- 유초등부 여름성경학교 - 주제: 나는 하나님을 예배해요!(롬12:1)
기간: 7월 18일(금) ~ 7월 20일(주일), 장소: 참된교회

- 중고등부 수련회 – 주제: 10대여 다시 태어나라(요3:3)
기간: 7월 24일(목) ~ 7월 26일(토), 장소: 파주 오산리 기도원

- 청년부 수련회 – 주제: 청년 광야(마3:1-3)
기간: 8월 14일(목) ~ 8월 16일(토), 장소: 강화도 불은농촌문화센터
521다시 로뎀으로 2025-06-29
‘번아웃 증후군’은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괴롭히는 가장 큰 적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장기적인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으로 소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증상 정도로 생각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탈진’(번아웃)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열왕기상 19장에서는 선지자 엘리야가 ‘영적 탈진’에 이르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8장에서는 갈멜산에서 850대 1의 영적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또한 3년간 극심한 가뭄에서 기도를 통해 큰 비가 내리는 기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그의 자리는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푸념 섞인 말로 하나님께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잠들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책망하거나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어루만지며’ 위로하시며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는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행20:24) 끊임없이 정진할 것을 말씀하지만, 반면 쉼과 안식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로뎀’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십니다. 심지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도피성’을 마련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뎀은 ‘피난처’였습니다. 그리고 위로의 장소였으며, 다시 사명을 회복한 곳이었습니다. 이후에 엘리야는 다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다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공동체의 표어입니다. 우리 교회가 ‘광야 한 가운데 있는 로뎀’이 되길 원합니다. 이러한 영적 안식과 평안, 그리고 자유가 있는 로뎀이 되길 소망합니다.
520다시 부르심으로 2025-06-22
오스기니스는 그의 책 「소명」에서 ‘소명’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 그분을 섬기는데 투자된다는 진리다’. 쉽게 말해 ‘부르심’이란 나의 조건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점입니다. ‘왜 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부르셨을까’. 그래서 이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 인격을 드려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여기에서 소명을 가리켜 다른 표현으로는 ‘다시 부르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모세를 떨기나무 가운데 부르신 사건(출3장), 또한 어린 사무엘을 실로에서 부르실 때에도(삼상3장), 공통적으로 인격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셨을 때 먼저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리고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것은 정확히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다시 부르심’과 더불어 수반되는 한 가지는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사무엘에게는 선지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다시 부르심’의 사건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를 다시 부르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다시 디베랴 호수의 어부 생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습니다. ‘빈 그물’은 그의 상실감과 공허함을 잘 대변해 줍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한 첫 마디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였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인격적인 부르심, 즉 ‘다시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이 시간 주님이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상을 좇아 달려가는 성도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519다시 오순절로 2025-06-15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태동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신도는 오순절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함께 모인 자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2:4) 사도행전은 이러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처음 데오빌로에게 이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데오빌로는 성령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성령님의 존재는 신선하고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는 예수님의 지상명령(행1:8)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그는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 사건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 다음에 따라오게 될 ‘권능’ 은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힘든 일인데, 무려 삼천명이 한 자리에서 변화되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이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파생되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놀라운 폭발력을 가진 능력입니다. 성령의 다이너마이트가 그 자리에 선포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변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성령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 그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입니다. 날마다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길 바랍니다.
518다시 미스바로 2025-06-08
성경에서는 여러 특정한 장소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갖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보리 언덕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언급하면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연상됩니다. 이와 같이 장소가 갖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창세기 31장에 나오는 ‘미스바’ 역시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원래의 뜻은 ‘망대, 감시대’(watchtower)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을 살피고, 감찰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야곱이 라반과 언약을 맺은 장소였습니다. 상호 간의 평화조약을 이곳에서 맺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스바는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리라’(창31:49)는 의미를 담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야곱에게는 또 하나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그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가는 길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사자, 즉 군대가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것을 가리켜 ‘마하나임’ 이라 부릅니다. 마하나임은 두 진영의 군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의 앞과 뒤에서 두 진영의 군대로 살피시고 있습니다.
결국 야곱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인생 전체를 살피시는 ‘미스바의 하나님’ 이셨습니다. 동시에 앞에서 오는 위기뿐만 아니라 뒤에서 덮쳐오는 예상치 못한 위협에서 건지시는 ‘마하나임의 하나님’ 이 되십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시대는 이러한 진퇴양난의 영적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영적 타락과 밖으로는 블레셋의 위협으로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을 때 사무엘은 외쳤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삼상7:5)
‘미스바 운동’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대각성 부흥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며 부르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 미스바로’ 올라갑시다!
517다시 이야기로 2025-06-01
성경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로부터 예수님 이야기까지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삶을 변화시키게 만듭니다. 단지 한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공동체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공동체를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40여 년에 걸친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성경은 우리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1:18)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르치고(teaching), 전파하고(preaching), 고치셨습니다(healing)’
마태복음 5장부터는 이러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적고 있으며, 이어서 8장부터 9장까지는 병 고침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3대 사역에 대한 이야기들 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리켜 ‘복음’ 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복음 사역의 대전제가 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것’(마9:36, 막 6:34)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동정하셨습니다’(히4:15).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까닭은 우리와 ‘똑같이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셨고, 고난당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516다시 벧엘로 2025-05-25
‘벧엘’ 은 야곱에게 있어 영적인 본향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을 가졌고,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에게서 야곱을 축복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벧엘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야곱이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십분의 일을 드리겠나이다’(창28:20-22).

하지만 지금 야곱은 벧엘이 아닌 세겜 땅 숙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야곱은 제단을 쌓았고, ‘엘엘로헤이스라엘’ 이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여기’가 아닌 ‘거기’, 즉 벧엘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게 되었을 때, 큰 재앙이 찾아오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딸 디나가 세겜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복수와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될 일촉즉발의 위기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35:1)
하나님의 뜻은 ‘여기’ 가 아닌 ‘거기’ 였습니다. ‘세겜’이 아닌 ‘벧엘’ 의 하나님 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른 길로 향하였다’ 정도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였다’(욘1:3) 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서 절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호와의 얼굴’ 앞입니다. ‘거기’가 ‘벧엘’ 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 ‘벧엘’은 어디 인가요?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적 본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