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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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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영화로우심" 2026-04-26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선포하는 자’ 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거침없이 선포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그들은 ‘증인’ 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선포할 때마다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삼천명, 오천명이 회심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모든 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4:21). 이는 예수 이름으로 선포하게 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46편에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고 선포하며 찬양합니다. 주가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큰 소리로 많은 이들에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내지 말고 침묵 가운데 지켜보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포하라’ 는 명령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마치 ‘고요 속의 외침’ 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가만히 있으라’, ‘침묵할 것’을 강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도(출14:14),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진격해야 할 때도(수6:10) 가만히 있을 것을, 그리고 침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역설의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자체가 역설이었습니다. 그것은 ‘영광’ 이전에 ‘저주’였고, ‘영생’ 이전에 ‘죽음’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영광과 함께 하는 고난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동시에 우리가 가야할 길에는 고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No Cross, No Crown)
563"임재하심" 2026-04-19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나님의 시내산 강림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출19:18)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강림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강림 사건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인류의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 곧 메시지가 되어서 십자가 위에서 직접 나타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확증해주는 사건입니다.

또 한 번의 하나님의 강림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처럼 ‘그 날’, ‘그 다락방’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강림하시게 될 때,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림’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이후에 더 이상 강림에 대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 날에 있을 재림주로 오실 예수님의 강림만이 예고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순절 강림 이후로는 ‘강림’이 아닌, ‘임재’가 있을 뿐입니다. ‘임재’는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미 강림하신 성령님께서는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도의 심령 안에 내주하시고, 매일의 삶에서 동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소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562"기름부으심" 2026-04-12
사도행전은 누가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주목하였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것이 의사였던 누가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가능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령의 행전, 즉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모티브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면서, 동시에 부푼 기대감으로 성령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그들이 준비해야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람을 세우는 일’ 이었습니다. 가룟유다를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직무를 맡을 자’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직무 맡은 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행1:22). 또한 ‘직무’에 해당되는 원어상의 의미는 ‘섬김, 봉사’입니다. 그래서 ‘직무 맡은 자’는 좁은 의미로 ‘사도’, 넓은 의미에서 ‘직분자’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여러 ‘직무 맡은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 부서에서 봉사자로, 다양한 직분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섬기는 일의 근본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직분자의 사명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준비된 증인들에게, 곧 직분 맡은 자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사도와 증인을 세우신 이후에 오순절 성령께서는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채우기 위해 각자의 그릇을 준비합시다.
561"부활후에" 2026-04-05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과 행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행전의 대전제는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전제가 거짓이라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증인들의 증언 또한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과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폭력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신념을, 즉 믿음을 지켜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증인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며 말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필 십자가에 못 박힌 중죄인을 믿느냐’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세상의 시선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주이고, 실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1)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증인들은 가장 미련해 보이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뜻인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을 삼기 위해’(행1:8) 먼저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주님의 명령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먼저 부르심에 순종하게 될 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께서 불어 넣어 주십니다. 오순절 그날처럼 말입니다.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560"머리를 깎았더라" 2026-03-29
사람이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결단과 각오를 담은 상징적인 행동일 때가 많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혹은 중요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을 다잡기 위해 변화를 선택합니다.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결단과 서원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겪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혔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핍박을 피해 떠나야 했으며, 아덴에서는 기대와 달리 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고린도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마음으로 서원하며 사역에 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받으시고 고린도에서 놀라운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고, 교회가 세워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역을 마친 후 바울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이 마쳐졌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명을 향한 출발을 뜻합니다. 그의 삶은 언제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에베소를 지나며 사람들의 간청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는 고백을 남기고 길을 떠납니다. 자신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던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순종을 통해 그의 길을 여셨고, 이후 그는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오랜 기간 머물며 말씀을 전하는 큰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원하던 길이 막히고 다른 방향으로 인도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순종을 배우게 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가장 합당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훈련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559"붙잡히다" 2026-03-22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때로는 권력이나 욕심에, 때로는 습관과 중독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문제는 무엇에 붙잡혀 있느냐입니다. 잘못된 것에 붙잡히면 결국 다른 사람까지 얽매이게 하지만, 바른 것에 붙잡히면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바로 그 예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위협과 살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을 붙잡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을 얽매던 자가, 사람을 자유케 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바울의 사역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덴에서의 사역은 기대와 달리 큰 열매를 맺지 못했고, 그는 낙심한 채 고린도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들 역시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실패자들의 만남처럼 보였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달랐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알지 못해도, 앞날이 보이지 않아도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방향은 ‘무엇에 붙잡혀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붙잡혀야 하나요, 그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558"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 2026-03-15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아덴까지 이어졌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덴은 헬라 철학과 그리스 신화가 중심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을 통해 인간의 쾌락과 이성을 강조했으며, 수많은 신전을 세우고 신들을 섬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심이 매우 강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도시 곳곳에 세워진 제단들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제단을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참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했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다시 듣겠다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종교심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심은 인간의 열심에서 시작되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 참된 신앙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아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과 이성이 발달하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가득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살아가지만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557"세 이레의 소망" 2026-03-08
사도행전 17장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두 가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계를 위해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밤낮으로 일하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중심에는 언제나 복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세 안식일 동안” 말씀을 강론했다고 기록합니다. 고작 세 이레, 약 3주에 불과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짧은 시간을 통해 많은 헬라인과 귀부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셨고, 이후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는 은혜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짧은 시간 속에서도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세 이레’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다니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세 이레 동안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응답이 세 이레가 끝난 뒤가 아니라,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첫날부터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간의 길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하는 그 결단의 순간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고,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게 하셨으며,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심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일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씨를 뿌리는 사람일 뿐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는 고백처럼 모든 성장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겸비하기로 결단하는 순간부터 역사하십니다. 세 이레의 시간처럼 짧아 보이는 순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그 시작입니다. 그 결단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믿음 가운데 새로운 소망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556"함으로" 2026-03-01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빌립보 감옥 사건은 신앙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한밤중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기도함으로 그리고 찬송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찬양은 조용한 독백이 아니라, 감옥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들을 수 있는 복음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뿐 아니라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풀어졌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를 자유케 합니다. 감옥 안에서 드려진 기도와 찬양이, 절망의 공간을 구원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역사합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감옥 간수가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위기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에게 참된 자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자유하던 바울의 모습을 통해 그는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되었고, 마침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묻게 됩니다. 바울의 대답은 단순하고 분명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와 그의 온 집안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함으로’였습니다. ‘기도함으로’, ‘찬송함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한 걸음 내딛는 신앙이 역사를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함으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도 기도함으로, 찬송함으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가정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555인정함이러라 2026-02-22
예루살렘 공회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 됨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마가 요한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심히 다투며 각자의 길로 가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분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조차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바나바를 통해 마가는 회복되었고, 바울은 디모데라는 평생의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더 굳건해지고, 그 수는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이어지는 2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세 번의 사인’을 받게 됩니다. 모두 자신의 뜻과는 다른 ‘가지 말라’는 사인이었습니다. 아시아로 가지 말라는 성령의 사인을 받았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지만 예수의 영이 막으셨습니다. 결국 계획과는 다르게 마게도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순종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은 단지 ‘가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멈추라’ 하실 때 멈출 수 있는 것도 순종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예비된 영혼을 통해, 빌립보와 유럽 교회의 시작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머물면 길을 잃기 쉽지만, 본질을 붙들면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순합니다. 그 분을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오늘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의 길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