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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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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예배하는 성탄절 2022-12-25
오늘은 성탄절이며 2022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성탄절 인사로 <메리크리스마스>라는 말합니다. 그 뜻은 메리(Merry/기쁨)+크라이스트(Christ/그리스도)+미사(mass/예배)로 “기쁨으로 그리스도께 예배” 한다는 뜻입니다. 즉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예배 보다는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욕망의 축제를 먼저 생각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성탄의 본질에서 떠난 즐기는 성탄절이 되다 보니 교회에도 예배 보다는 즐기려는 세속의 욕구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다 문득 언제가 묵상했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이 생각이 났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300Km 떨어진 부르고뉴 주(州) 손에루아르 현(縣)에 있는 역사적인 수도원입니다. 910년 아퀴타니아의 빌헬름 공작(Guilaume de Aquitaine )이 자신의 별장을 교회에 기증하면서 설립되었습니다. 건물의 크기만 하더라도 축구장 2개를 연결한 것만큼 큰 수도원입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설립 초기부터 영성에 관심을 두고 교회개혁을 단행한 수도원입니다. 설립 때부터 클뤼니 수도원은 봉건적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경비는 신자들의 자유로운 헌금으로 하며, 수도원장의 선출은 직선제로 하고, 생활은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와 노동과 공동예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분명히 하고 출발한 수도원입니다. 하지만 10-11세기 교회개혁의 중심이던 클뤼니 수도원이 유럽에 2000 개가 넘을 정도로 부흥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속정신이 수도원 안에 들어오고 처음 주장하던 영성이 타락하게 되니 수도원은 타락하고 점점 약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교회 안에 욕망의 세속정신이 들어오면 경건한 영성이 깨지고 예배가 소홀이 됩니다. 성탄절 역시 주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즐기려는 세속의 축제가 먼저 되면 교회는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세속정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배와 영성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2022년 마지막 주일이며 성탄절에 우리는 메리크리스마스(예배하는 기쁨의 성탄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영성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예배 중심의 삶을 되어야 합니다. 2023년에는 예배의 회복으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93파루시아(재림)를 기다리는 사람들 2022-12-18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사마의(司馬懿)의 오장원(五丈原) 싸움은 매우 유명한 싸움입니다. 234년에 촉나라 승상 제갈공명은 3년간 전쟁 준비기간을 거쳐 다섯 번째의 북벌에 나섭니다. 지금까지 싸우던 우회적인 길을 버리고 험난한 산길을 택하여 장안성을 단숨에 정복하려고 가까운 오장원을 택하여 위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위나라 사마의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위나라 사마의는 좁은 협곡에 위치한 오장원에서 나오지 않고 100일간 수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정복을 하려고 단숨에 먼 길을 달려온 촉나라 군사를 지치게 하며 군량미가 떨어지게 하는 작전입니다. 이때 제갈공명은 수비만 하는 사마의에게 겁쟁이라는 표시로 여자 옷을 보냅니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어 나와서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 옷을 받은 사마의는 오히려 태연히 웃으며 여자 옷을 입고 춤을 춥니다. 이때 옆에 있던 장수들은 모욕적인 일이라 하여 나가서 싸우자고 하지만 사마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때를 기다립니다. 결국 먼 길을 과로하게 달려온 제갈공명은 병으로 그곳에서 죽게 됩니다. 촉나라 제갈공명에게 여자 옷을 선물 받는 치욕적인 모멸감을 받았으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한 사마의가 최후 승리합니다. 기다리는 자는 반드시 기회를 잡게 됩니다.
성경에는 기다림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기까지 기다렸고, 이삭은 흉년에 100배의 축복을 받기까지 기다렸고,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기까지 14년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10년을 넘게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고 700년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2가지 신앙의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리기에 인내합니다. 미래의 소망이 있으면 기다리며 인내합니다. 둘째는 자신에게 반드시 옳은 일,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믿는 자들은 기다립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재림의 신앙 즉 <파루시아>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37:7)
392어느 수도사의 기도 2022-12-11
문득 언젠가 읽었던 무명 수도사의 기도문이 생각나 찾아보았더니 2018년 2월에 주보 칼럼에 소개했던 기도문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백발이 되어 세상을 떠날 것인데 너무 조급하게 남을 교훈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대화할 친구가 있으면 좋겠으며, 또한 기억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너무 자기주장만 하지 말고 서로 이해하려 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희망의 기도입니다.

주님,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늙어가고 있다는 것과 언젠가는 백발 노인이 되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내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모든 문제와 상황에 대해서 일일이 다 충고해 주어야 한다는 치명적인 습관을 멀리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일을 내가 다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고 애쓰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깊게 하되 침울하지 않게 하시고 남을 도와주되 나서지 말게 하소서 나에게 저장된 지혜의 보물을 사용하는 것보다 나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삶을 나눌 몇몇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나의 삶이 성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심술 맞고 고집 센 노인네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둘 다 내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은 당신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고 나타낼 수 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마지막 한 가지 부탁은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내 인생의 촛불이 꺼져가는 그 순간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는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2022년 금년도 벌써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광음여류(光陰如流)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 어떻게 살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수도사의 고백처럼 “생각을 깊게 하되 침울하지 않게 하시고 남을 도와주되 나서지 말게 하소서”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91함께 이루는 공동체 2022-12-04
사회학에서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集團知性)이란 다수의 개체들이 서로 협력과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된 지적 능력의 결과를 집단 속에서 발휘하는 능력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보통은 IQ 90의 사람들이 100명 모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IQ 120의 지능적인 한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IQ 90의 사람 100명이 모여서 서로 대화하며 생각하는 것이 IQ 120의 한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서로위키(James Surowiecki)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특정 조건에서 집단은 집단 내부의 가장 우수한 개체보다 지능적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1910년 미국의 곤충학자 윌리엄 모턴 휠러(William Morton Wheeler)는 개미들의 생활을 연구하여 발표했습니다. 연구 결과 개미들은 홀로 생활하지 않고 모여 군집을 이루고 사는데 집단에서 각 개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합니다. 개미들의 각 개체를 보면 여왕개미, 숫개미, 일개미로 분류됩니다. 여왕개미는 집단을 보존하며 번식을 위하여 알을 낳고 숫개미는 평소에는 빈둥대고 놀다가 여왕개미가 알을 낳도록 수컷 역할을 합니다. 일개미는 병정개미로 집단을 보호하고, 청소와 어린 개미를 보호하는 시종개미, 그리고 밖에 나가서 먹이를 구해 오는 수렵개미로 나누어집니다. 이들 개미는 하나의 개체로는 미미하지만 집단 공동체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지능체계의 집단입니다. 개미가 개체 하나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집단으로 살아가는 모습의 협업은 큰 힘을 발휘하듯 우리 사회는 서로 함께한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명(Calling)의 사람들이 이루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혼자 옳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주일에 각부서 총회를 했습니다. 교회는 함께 이루어 가는 공동체임을 알고 임원에게만 일을 떠넘기듯 하지 말고 회원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집단지성의 부서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어 가는 사명자입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함께 소속된 부서에서 충성을 다하며 천국으로 가는 순례길에 열심을 냅시다.
390다시 희망으로! 2022-11-27
<희망>의 제목으로 여러 차례 글을 썼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희망>은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할 단어입니다. 희망의 신학을 주장한 독일의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앙과는 조금 다른 입장의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말은 주의 깊게 생각할 단어입니다. 몰트만은 18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3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수용소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끝까지 생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한 사람들은 일찍 죽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지켜본 몰트만은 독일로 돌아와 괴팅겐 대학의 신학부에 입학하였습니다.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을 발표합니다. 그자 주장한 신학의 본질을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말에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언제가 소개한 백창우 시인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시를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 거야 /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 거야 /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테니 //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 울릴테니 /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 끝이라고 생각될 때 /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걸.

2022년 마지막 12월 한 달이 남았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고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현실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번 결단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결단! 희망의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389구약의 추수감사절-초막절(草幕節) 2022-11-20
구약 시대의 3대 절기는 (1) 유월절(逾越節): Passover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 중 열 번째 장자의 죽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았던 일을 기념하는 절기 (2) 오순절(五旬節): 유월절로부터 50째 되는 날로 칠칠절 혹은 맥추절로 부르며 (레 23:15-16, 신 16:9)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드리는 절기(다른 말로 초실절, 칠칠절, 맥추절) (3) 초막절(草幕節)/수장절(收藏節): 일년 농사를 지어 추수한 후, 포도와 곡식을 곡간에 넣어놓고 나무와 풀로 장막을 지어 1주일간 초막에 나와 생활하는 절기. 이렇게 구약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이 가운데 추수감사절 절기와 같은 의미의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레위기 23:39에 <여호와의 축제>라고 기록된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신명16:13-15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의 고난을 기억하고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 곡간에 다 들여놓고 지키는 절기이기에 수장절(收藏節)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절기를 지킬 때 신16:14 말씀처럼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라는 기록을 보면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기쁨의 축제(祝祭 Festival)입니다. 초막절을 7일간 지키는데(신16:15)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라는 말씀처럼 빈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가지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힘 되는대로, 또한 복 주신대로 감사며 드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초막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신16:15절의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온전히 즐거워하라>는 뜻은 완벽하게, 그리고 오로지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그리고 낙심하지 말라 너희는 오로지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2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오직 즐거워하는 주일 되기를 바랍니다.
388낙엽(落葉)을 보면서 2022-11-13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다 은퇴하신 옥한흠 목사님이 쓴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처음부터 쓴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평상시 설교한 내용을 모아서 책으로 내놓은 설교집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소명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기에 고난 중에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갑작스러운 고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건강, 사업, 직장, 자녀, 가정의 문제들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도전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소명자는 언제든지 새롭게 도전합니다. 잠24:16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난 중에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소명자는 나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말에 <늦었다고 하는 순간 가장 빠른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명자는 죽을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74살에 <도덕형이상학>이라는 최고의 철학서를 내놓았고 미켈란젤로는 87세에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모세는 80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 가을입니다. 사람들은 낙엽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이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무엇인가에 떠밀리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무는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잎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 눈보라를 견디기 위한 생존의 본능이며 살기 위한 자기희생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진 가지만 앙상한 겨울나무일지라도 따뜻한 봄이 오면 파릇파릇 나뭇잎이 다시 움틀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 받은 소명자입니다. 낙엽 지는 가을에 낙심하지 말고, 새봄이 되면 나무에 새싹이 나오듯 우리의 인생도 새로운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을 꿈꾸며 도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낙엽을 보면서 희망 없는 쓸쓸한 인생의 황혼기를 생각하지 말고 새롭게 도전하는 2022년 가을이 되기를 바랍니다.
387구속(拘束)이 아니라 구속(救贖)입니다. 2022-11-06
우리 말에는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실생활에도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쓸 뿐 아니라 특히 법률용어는 더욱 한자어를 쓰기 때문에 일반인은 사전을 찾아보아도 뜻을 모르거나 아예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오래전 국정감사장에서 법제처장에게 국회위원이 몽리(蒙利)', '저치(貯置)', '전촉(轉囑)', '결궤(決潰)', '위기(委棄)', '호창(呼唱)' '분마' '장리' '삭도' '정려' 등 10문제의 뜻을 물었는데 두 문제만 맞추었습니다. 100점 만점에 20점을 받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전문가의 뜻을 풀이를 보니 '몽리'는 '저수지 등 수리 시설의 혜택을 입음'이라는 뜻이고, '저치'는 '저축하여 둠'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은 법률을 읽어도 그 뜻을 모릅니다. 법률용어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경에도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나옵니다.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잠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여기에서 <초달>은 잘못을 다스리기 위하여 회초리를 때리는 일이고 <한담>은 심심풀이로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어려워서 뜻을 모르는 말이 있는가 하면 뜻을 잘못 이해하고 혼동하여 쓰는 말도 있습니다.
구속(救贖)을 구속(拘束)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속(救贖)은 억압당하고 있는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적으로 죄인인 우리의 몸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拘束)은 법률용어로 “법원 또는 판사가 피의자나 피고인을 강제로 잡아 가두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구속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자유를 말하며 법률용어의 구속은 강제로 잡아두는 자유를 억압하는 일입니다. 특히 구속의(救贖)의 속(贖)이라는 말은 <죄를 씻으려고 벌 대신 바치는 물품>을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예수님의 구속(救贖)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386위대한 말실수 2022-10-30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가로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됩니다. 서쪽은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종교와 노동의 자유가 보장된 의회민주주의 국가가 되고, 동쪽은 독일 민주 공화국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공산 국가가 됩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면서 경제적으로 부흥하지만 동독은 공산주의의 강력한 통제 아래 경제가 어려졌습니다. 동,서의 경제 성장이 차이가 나니 동독에서 잘사는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때 동독은 특단의 조치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구축합니다. 장벽이 세워지자 동독 주민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합니다. 비록 탈출하다가 사살되고 체포되어 고문을 당할지언정 자유를 향한 탈출은 계속되었습니다. 45년간의 긴 세월 동독 사람들은 서독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동독 주민들이 자유 왕래를 원하고 있을 때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의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Gunter Schabowski)가 말 실수를 하게 됩니다. 새로 바뀐 여권법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언제쯤 동독에서 서독으로 자유롭게 여행을 할수 있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기자가 다시 질문하길 “언제부터입니까?”하자 “내가 알기로는 지금 당장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정부가 허락하는 여권에 의하여 갈 수 있다는 내용인데 여행법을 잘 알지 못하고 <정부의 허락이 없어도 언제든지 누구든지 갈 수 있고 지금 당장 갈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방송을 본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나와 수비하는 군인들을 밀어내고 서독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1989년 11월 9일은 45년간의 냉전체제가 끝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날입니다. 당시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Gunter Schabowski)의 말실수가 독일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샤보브스키의 말실수를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세기의 말실수, 정치인의 위대한 말실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금 남,북으로 나누어져 서로 반목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핵전쟁의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바라는 것은 통일 조국입니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있었던 정치인의 말실수라도 바라면서 나라를 위한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385장로, 권사, 안수집사 2022-10-23
지난 9월 <직분자>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우리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몇 가지 조건을 강조했습니다. 1)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성경읽기). 2)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늘 기도하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모든 예배참석, 기도생활). 3) 교회 행사와 봉사에 적극적인 사람으로 세워야 합니다(각 부서에서 봉사). 4) 물질과 생활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세워야 합니다(감사, 십일조). 5) 교회 부흥을 꿈꾸는 사람으로 자원하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긍정적 생각, 서로 사랑). 물론 임직자의 신앙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의 직무에 대하여 <교단 헌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당회의 구성원인데 교단 헌법에 당회는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총찰. 당회의 직무는 신령상 모든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니(히13:17) 교인의 지식과 신앙상 행위를 총찰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모든 신앙상의 행위를 지도하며 가르치고 예배 회집, 성례 그리고 교인의 입교, 이명, 출교에 대한 제반 사항을 총괄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장로는 목사가 말씀을 전했을 때 성도들이 그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는지? 시험에 들지 않았는지? 이단에 빠지지 않았는지? 등의 성도에 대한 신앙을 살펴보는 직분입니다. 이러한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모든 예배(주일,수요,금요,새벽)에 참석해야 합니다.
권사는 “당회의 지도 아래 교인을 방문하되 병환자와 환난을 당하는 자와 특히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을 돌보아 권면하는 자”입니다. 집사는 “목사, 장로와 합력(合力)하여 빈핍 곤궁한 자를 권고하며 환자와 갇힌 자와 과부와 고아와 모든 환난당한 자를 위문하되 당회 감독 아래서 행하며 교회에서 수금한 구제비와 일반 재정을 수납 지출(收納支出) 한다(행 6:1∼3)”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자격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자격이 있다고 대답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이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 투표할 때 기도하면서 신실한 사람을 선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