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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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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맥큔(McCune) 선교사 2017-08-13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1905년 한국에 파송 받아 선교 활동을 한 조지 맥큔(George Shannon McCune 1872~1941) 선교사는 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을 지극히 사랑한 선교사입니다. 맥큔 선교사는 윤산온(尹山溫)이란 한국 이름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미국 미주리 주 출신으로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그의 아내와 함께 1905년 선교사로 한국에 옵니다. 1909년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新聖)학교 제2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신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미국의 독지가 오닐(Hugh Oneil) 부인으로부터 15천 달러를 기부 받아 학교를 발전시켰습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 건립에 필요한 재정이 1만 달러였으니 15천 달러가 얼마나 큰 재정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선천의 신성학교는 기독교 학교로 당시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습니다. 신성학교 출신들을 보면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 서울대 총장 장리욱 박사, 의사 장기려 박사, 차병원 차경섭 박사, 사상계의 장준하 선생, 신학의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방지일 목사 등이 신성학교 출신입니다.

맥큔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2번씩이나 추방 받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 추방은 1919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숨겨주고 독립운동을 했다하여 1921년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을 사랑한 그는 1928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숭실전문학교(1928-1936) 4대 교장 직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합니다. 19351213일 밤 평양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평양 시내 27개 교회 대표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를 결정합니다. 이에 1936120일부로 총독부 평남지사 야스다께(安茂直夫)60일간 기간을 주고 거기에 따라 학교 폐쇄와 추방여부가 결정된다고 통고합니다. 결국 맥큔 선교사는 숭실학교 교장직를 파면 당했고 강제 출국 당했습니다. 한국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들을 지원했고 한국에 대한 연구 자료와 글을 써서 한국을 소개하다 1941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1963년 건국공로훈장을 주었습니다. 72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들의 애국정신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129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2017-08-06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이 쓴 책 제목입니다. 책 제목을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로 붙이게 된 이유는 1995년 개봉한 아폴로 13영화 때문입니다. 주인공 톰 행크스는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하려던 중 우주선 기체에 중대한 결함이 발생하여 궤도를 수정하여 지구로 급히 되돌아 와야 합니다. 우주선 승무원들은 컴퓨터도 작동이 안 되는 상황에서 수동으로 궤도를 수정하여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궤도를 수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생사(生死)를 가르는 일이기에 이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을 살아갈 때 뜻하지 않는 사건과 사고를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아폴로 13호 승무원들이 침착하게 궤도를 수정하여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는 것처럼 인생 여정의 적절한 궤도 수정을 해야 합니다. 책의 내용은 4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궤도를 수정할 때를 말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회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2떠나라는 부르심과 함께 시작하라’ 3따르라는 도전과 함께 계속하라’ 4최고의 가능성을 향해 팔을 뻗으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은 15장에서 내 안에 많은 인형들를 이야기하면서 큰 인형 안에 여러 개의 똑 같은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을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의 자아 속에 러시아 인형처럼 서로 다른 형태의 가 존재하는데 어떤 때는 아이처럼 천사같이 행동하다가 어떤 때는 깡패처럼 마피아 조직처럼 폭력적으로 나타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갈등하게 하는 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잘못된 자아를 바르게 하려면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길로 궤도를 수정해야합니다. 우리는 바른 삶을 살려면 날마다 바른 길, 말씀의 길로 궤도를 수정하는 작업을 매일, 매 순간 해야 합니다.

여름 휴가철, 만약 내 인생이 말씀의 궤도에서 떠나 다른 길로 가고 있다면 생사(生死)걸고 궤도를 수정하는 아폴로 13호 승무원처럼 새롭게 도전하는 시간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더 늦기 전에 궤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128신앙의 슬럼프(slump) 2017-07-30

영국 프로축구 팀 스완지 시티에서 활동하는 기성용 선수는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최근 부상과 극심한 슬럼프(slump)에 빠져 고생을 많이 합니다. 슬럼프가 오면 팀에서 출전 기회도 얻지 못하고 국가대표로 선발이 되어도 성적이 부진해집니다. 운동선수들에게 슬럼프는 고통스러운 기간입니다. 슬럼프는 사전에 심신의 상태 또는 작업이나 사업 따위가 일시적으로 부진한 상태라고 설명을 합니다. 다른 말로 침체, 부진으로 표현합니다. 슬럼프의 원인을 알면 극복하기 쉬운데 대부분의 선수들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 갑작스러운 성적부진의 슬럼프에 빠집니다. 기성용 선수는 슬럼프가 오면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기 위해 음식조절과 기초 운동을 통하여 벗어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기성용 선수 뿐 아니라 운동선수 대부분은 슬럼프가 오면 기초훈련을 다시 시작합니다.

운동선수들의 슬럼프처럼 신앙생활에도 슬럼프(slump)가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이유 없는 불안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신앙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길은 운동선수처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본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동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중 제1문항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 영광과 그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슬럼프가 오면 나는 지금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가? 또한 그를 즐거워하는가?를 깊이 생각하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와 위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외침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베드로 사도처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말씀을 묵상하므로 어려운 신앙의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127좋은 스승을 위한 기도 2017-07-16

중국의 초나라 때 황제였던 회왕이 항우에게 살해당해 강물에 던져진 것을 추모하는 글인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조선 초기 학자이며 선비였습니다. 조의제문은 중국의 회왕을 추모하는 글이지만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사약을 받은 단종을 추모하는 글로 해석되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 글 때문에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고 죽은 사람의 유골을 끄집어내어 다시 찢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김종직의 학문은 절의(節義)를 중요시하는 도학(道學)사상이 중심사상입니다. 김종직이 이렇게 유명한 학자가 된 것은 그에게 좋은 스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종직을 어린 시절부터 가르친 스승은 그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1389-1456)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숙자는 고려말기 대() 학자였던 정몽주와 길재(吉再1353-1419)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김종직의 학문의 계보를 요약하면 정몽주,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정여창 -> 조광조 -> 이퇴계까지 이어져집니다. 사람들이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학문을 논할 때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퇴계를 동방4현이라고 부릅니다. 동방4현으로 알려진 선비들의 학문의 근원을 보면 결국 김종직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위대한 학자의 뒤에는 그를 가르친 좋은 스승이 있습니다.

구한 말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1902년까지 미국의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 14명이 들어와 활동을 했습니다. 시카고의 작은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이 이처럼 한국에 많이 온 것은 당시 맥코믹 신학교에 크레이그(Craig)박사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크레이그 박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양선교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은 사무엘 마펫, 번하이셀, 곽안련, 기포드, 배위량, 이길함, 사무엘 무어, 소안론, 테이트 등이 한국의 선교사로 온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한 환경에도 좋은 스승은 위대한 제자를 양육합니다. 이제 2017년 참된교회 교육부서 여름 행사가 시작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위대한 스승이 되어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있도록 특별한 기도와 격려가 있기를 바랍니다.

126독서 그리고 여행 2017-07-09

1883년 고종황제는 민영익 대감을 주축으로 하여 보빙사(報聘使)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최초 외교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합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변수, 유길준 등 11명이 인천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태평양 횡단 여객선 아라빅 호를 타고 1달 반 만에 188392일 샌프란시스코 도착합니다. 이들은 미국 횡단 철도를 타고 918일 뉴욕에 도착하여 아셔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미국에서 이들은 세계산업박람회, 방직공장, 해군, 철도회사, 전기회사, 병원, 교육제도 등을 시찰하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때 함께 갔던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유학을 하고 민영익, 서광범, 변수 등은 미 해군 함대 트렌튼 호를 타고 세계 여행을 하고 돌아옵니다. 이들은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서 대영박물관을 관람하고 파리, 로마, 스에즈 운하를 거쳐 이집트의 피라밋, 인도의 봄베이, 스리랑카의 콜롬보,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거쳐 미국을 떠난지 6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갓을 쓰고 미국에 갔던 이들이 6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했으니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꼈겠습니까? 민영익은 귀국하여 미국 공사 푸트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방금 광명의 세계를 보고 내가 태어난 암흑의 세계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가야할 길을 확실히 모르지만 곧 갈 길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민영익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큰 경험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남아서 공부를 하던 유길준 역시 돌아올 때 세계 여행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는 돌아와 1895<서유견문(西遊見聞)>이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당시 개화(開化)의 본질을 밝히는 책입니다. 20편의 내용 중 서론에 해당하는 제1-2편은 세계의 지리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유럽을 경험한 그는 세계는 넓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행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여름방학이 시작됩니다. 방학 중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많은 계획을 세우실 것입니다.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려면 아주 잘 계획된 여행을 시키세요. 그리고 책을 읽히세요. 독서 그리고 여행을 통하여 꿈이 있는 자녀로 양육합시다

125감사주일 2017-07-02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부남리에 부광교회를 시무하는 이상도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은 서울에서 목회를 하시다 1997년 친구 목사님 후임으로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이상도 목사님은 시골로 오신지 1년이 지난 19985월에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됩니다. 아침에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인사하고 나간 아들이 죽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너무나 슬퍼 몇 날을 울고 울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 장례를 마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의 교통사고 보상금 1억을 받아 친구 목사님 교회에 헌금을 합니다. 친구 목사님은 1억 감사헌금을 가지고 삼척에서 조금 떨어진 원덕읍 임원리에 감사교회를 개척합니다. 부광교회 이상도 목사님 아들의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세워진 교회가 감사교회입니다. 분명 아들을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보낸 것이 감사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상도 목사님은 믿음으로 감사를 표현했으며 그 감사의 표현이 감사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슬픈 상황에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감사절 행사로 1주일 전에 성도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다음 주일 교회에 올 때에는 100가지 감사를 적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대부분이 100가지 감사를 적는데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주일학교 아이가 쉽게 숙제를 했습니다. 아이의 100가지 감사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감사했고, 귀로 듣는 것을 감사했고, 입으로 먹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1주일동안 100가지 감사를 고민하면서 적었지만 아이는 너무나 쉽게 100가지 감사를 적었습니다. 감사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영국 부흥사 스펄젼 목사는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감사주일입니다. 2017년 상반기를 주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4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 2017-06-25

화공 약품인 아세톤은 물, 알코올, 에테르 등 대부분의 용매와 잘 섞이며 상온에서 휘발성이 강하며 인화성이 큰 물질입니다. 그런데 아세톤은 포탄을 제조할 때 꼭 필요한 화공약품입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많은 포탄을 만들기 위하여 아세톤이 대량으로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자국에서 아세톤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아세톤 원료인 사탕수수를 수입에만 의존 하던 영국은 전쟁으로 해상이 봉쇄되어 원료를 구입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다급한 상황에 맨체스터 대학의 화학 교수였던 하임 바이쯔만 (Chaim Weizman 1874-1952)박사가 사탕수수가 아닌 감자의 녹말에서 아세톤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합니다. 바이쯔만 교수의 아세톤 제조 기술은 전쟁의 상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결국 영국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아세톤의 대량 생산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바이쯔만 교수에게 포상을 하려했습니다. 그러나 바이쯔만 교수는 포상을 거절하고 자신이 따르던 시온이즘(Zionism)을 지지해달라고 합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2500년 동안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진 유대인)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난후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면서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시온이즘(Zionism)를 주장하게 됩니다. 영국은 바이쯔만 교수의 요구대로 시온이즘을 지지해줍니다. 바이쯔만 교수는 개인의 이익과 명예를 택하지 않고 나라를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1948년 이스라엘을 독립 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오늘은 6.25전쟁 67주년 되는 날입니다. 67년 전 1950625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은 하루아침에 동족상잔(同族相殘)비극의 현장이 됩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북한의 핵문제, 사드 배치문제 등 외교적으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처럼 국가안보가 어려운 시기일수록 과학자 바이쯔만 교수의 나라 사랑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우리는 언제나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123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2017-06-18

로버트 토마스 (Robert J Thomas 1840-1866) 선교사는 개신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토마스는 1840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3년 런던 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후 고향 교회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 죽자 큰 슬픔에 잠겨 그는 선교사를 사직하고 청나라 해상세관에 통역관으로 취직합니다. 세관의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그는 조선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수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부터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선교의 관심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린 것입니다. 1865년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해 중국을 떠나 서해안 자자리(紫羅里)에 와서 2개월간 한국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어느 정도 한국어를 구사할 때 즈음 그는 1866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의 통역관과 <성서공회 파견원>의 자격으로 승선하여 평양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가 탄 셔먼호가 입항하려다 주민들과 마찰이 일어나 배가 불타게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는 92일 현장에서 순교합니다. 그가 중국을 떠나면서 마지막 보고한 선교 보고서에는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갑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을 생각하며 희망에 차 있습니다.”로 나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오면 환영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는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대동강에서 순교합니다. 그는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고 온 한문성경을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성경을 받아본 박춘권은 훗날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설립했고 그가 전한 성경책을 뜯어 벽지를 바른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 온 것입니다. 우리는 대동 강변에서 27살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4)

122보고 자라는 아이들 2017-06-11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갔을 때 목사님의 옥바라지와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노력한 산정현교회의 유계준 장로님이 계십니다. 유계준 장로님은 일제시대에 민족이 어려움을 겪을 때 고당 조만식 장로를 비롯하여, 김동원, 방계성, 오윤선 장로님과 함께 산정현 교회를 굳게 지킨 믿음의 사람입니다. 조만식 장로는 유명한 애국지사요, 오윤선 장로는 숭덕학교를 세웠고 유계준 장로는 숭인상업학교를 세워 지원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자금 보내며 도왔던 분이 유계준 장로님입니다. 유계준 장로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기며 이웃을 돕는 신앙으로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자녀들에게 남을 도우려면 의사나 약사가 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유계준 장로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후손들은 지금도 하나님을 잘 섬기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후손 중에 의사와 약사 26명이나 됩니다. 이 가운데는 국립의료원 원장과 서울대학 총장을 지낸 분도 있습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김응선 장로님은 자녀들에게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말씀을 가훈으로 가르쳤습니다. 김응선 장로님은 가난하여 재물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는 못했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만은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어느날 겨울에 새벽기도회를 가다가 개울에 빠졌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다시 갈아입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가난하여 끼니를 굶더라도 새벽 기도하는 것과 주일예배와 십일조만은 철저하게 지켰으며 자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장남 김홍규 장로는 순천 매산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차남 김병규 장로와 3남은 회사를 설립하여 큰 회사의 회장이 되었고, 4남은 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5남 김승규 장로는 서울법대를 나와 검사로 재직하다 법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 빌딩을 물려주는 것보다 몇 천배 옳은 일입니다. 주일성수와 기도하는 신앙과 십일조,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신앙을 가르쳐 신앙의 명문 가문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121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 2017-06-04

<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과거 남양 만에서 두레 공동체를 설립하여 이끌던 김진홍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대구 계명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본교에서 철학개론을 강의할 때 학생으로부터 " 교수님, 우리가 일생 생명을 바쳐 따를 진리란 무엇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질문에 충격을 받아 대학 강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진리>를 찾아 방황을 하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어느 날 학교 선배로부터 성경 에베소서 17절의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는 구절을 소개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기독교 진리를 찾은 목사님은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오랜 세월의 방황을 마치고 진리 실천의 길을 택하여 목회자가 됩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쓴 책중에 <새벽을 깨우리로다> <정금 같이 나오리라> <비전 있는 교회> <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 > 등이 유명합니다.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라는 책은 제목에서 말하듯이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은 항상 우리를 낙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환경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환경에 적극 도전하여 고난을 극복하려 노력합니다. 꿈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합니다.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는 것은 희망의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 마침내 꿈을 이룬 사람들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를 다룬 책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중에<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어라> 책 역시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는 꿈을 이룬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푸른 계절 6월에 낙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꿈을 향한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2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