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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위그노(Huguenot)의 후예들(2) | 2015-02-15 |
지난주에 이어 위그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글을 씁니다.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자들을 우리는 “위그노” (Huguenot-동맹 공동체의 사람들)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개신교 칼빈주의 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등장으로 “낭트칙령”이 폐지되고 박해가 다시 시작되자 조국 프랑스를 버리고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영국, 미국 등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탈출을 감행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직업소명”을 믿는 자들로 기계, 제철, 염료, 화학, 모직 등 고도의 하이테크 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소기업인들이었습니다. 영국의 찰스 2세는 당시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던 위그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 이민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민법에 의하여 영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영국의 기계공업과 면방직 공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증기기관을 발전시켜 상용화 시킨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대표적인 위그노 출신입니다. 이러한 위그노 중심의 기술의 발전은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편 스위스로 들어간 위그노들은 제네바를 기점으로 하여 산속 마을인 샤프하우젠과 쥐라 지방에 정착하여 스위스 정밀산업인 시계산업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만든 시계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롤렉스, 오메가, 위블로, 예거르꿀뜨르, 파텍필립,등 명품시계 브랜드입니다. 지금도 500개의 시계회사에서 3만 명의 장인들이 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제네바 뒷골목에 소규모 은행을 열었는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거래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재산형성 과정과 예금액 등을 알 수 없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거래원칙이 오늘날의 2500조의 스위스 비밀은행이 된 것입니다. 유럽으로 흩어진 위그노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이라는 <직업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위그노가 믿던 칼빈주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위그노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직업소명>의 의미를 깨달아 열심과 충성을 다하면 각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위그노 신앙의 후예>답게 모든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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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스완슨 선교사를 부르신 하나님 | 2015-02-23 |
1952년 6.25 전쟁이 한참이던 겨울 어느 새벽에 서울 거리를 거닐던 미국인 선교사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은 길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치우는 인부들의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쟁 중에 아이들이 이렇게 죽어가는 서울 거리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스완슨 목사님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국의 어린이들을 돕자고 호소합니다. 그후 40년 동안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켐패션(Compassion)운동을 전개하여 미국 크리스찬의 후원으로 10만명의 한국의 전쟁고아와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끼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의 켐패션 운동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어린이에게 <꿈을 잃은 어린이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망을> 전하는 구호단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후원국이 미국, 영국,독일,캐나다,호주,프랑스,뉴질랜드,이탈리아,스위스,한국등 10개국이며 수혜국은 세계 26개 나라의 어린이 110만 명에게 5100개의 지역교회를 통하여 먹을 것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한국은 지난 2003년에 수혜국에서 후원국이 되었습니다. 컴패션의 비전은 빈곤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세계의 어린이들을 영적, 정서적, 사회적, 육체적, 그리고 감성적 빈곤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긍극적으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함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운영철학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중심(Christ-centered), 어린이 대상( Child-focused), 지역교회중심(Church-based) 재정의 투명성(Committed to Integrity)을 단체의 원칙으로 합니다. 스완슨 선교사 한사람의 시작이 이제는 세계 110만명의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켐패션 운동을 보면서 스완슨 선교사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큰 역사를 이루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켐패션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어린이를 돕기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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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 | 2014-06-15 |
6월은 나라를 사랑하는 달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며 6월6일은 현충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위하여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정치의 일선에 나서서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 자신의 맡은바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 그 외에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36년 동안에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나라사랑을 실천할 때 일본과 맞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또한 후진들을 양성하여 훗날을 기약하는 인재양성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나라를 사랑한 김약연 목사님은 함경도에서 만주로 온 집안이 이주하여 1908년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워 인재들을 양육했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의 이주 동기는 그의 글에 나타난 것처럼 “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주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당시 동명학교에서 새로운 신학문을 가르치려고 신학문을 배운 정재명 선생을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정재명 선생은 부임조건으로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칠 것과 학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재명 선생이 부임하면서 명동학교는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쳤고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동휘 선생이 이곳으로 오면서 기독교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가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무력 탄압 속에서도 만주의 교회는 성장하여 1921년에는 105곳의 교회가 있었고 교인이 6천3백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명학교 출신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 선생과 시인 윤동주 선생이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자신의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도 나라사랑의 방법입니다. 특히 훗날을 위하여 인재양성에 전심전력하는 것도 나라 사랑의 방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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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잔인한 4월을 보내면서 | 2014-04-27 |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온 국민이 아파하는 세월호의 침몰을 바라보면서 슬픔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 분노로 표출 되고, 욕설이 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광장에 나가 나쁜놈, 죽일놈, xx놈들 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목사라는 체면 때문이랍니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데. 바르지 못한 것에 동조하고 불의에 눈감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는데. 함석헌 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가 가슴에 메아리쳐 옵니다.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RMS Titanic)호는 첫 항해 중 빙산과 충돌하여 북대서양에 침몰하였습니다. 당시 1,514명이 사망하였고 구조된 사람은 710명 정도였습니다. 타이타닉 호의 선장은 존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배가 침몰할 때 마지막까지 조타키를 잡고 그대로 서 있다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스미스 선장의 고향 리치필드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의 동상 앞에는 “Be British(영국인답게 행동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선원들에게 마지막 한 말입니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은 죽음 앞에 비겁하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원들은 마지막까지 승객들의 구조에 열심을 내었고 선장의 지시에 의하여 어린이와 여자를 먼저 구멍보트에 태웠습니다. 이것은 바다의 법칙(the rule of the sea)이라 하여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승객들 먼저, 그리고 선원들이 내리고 마지막으로 선장이 배에서 내립니다. 이러한 전통은 해양인들의 시맨쉽(Seamanship)이 되었습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배에 놔두고 자신들만 살려고 탈출했으니 시맨쉽(Seamanship)을 저버린 비겁한 행동입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이 없는 황무지와 같은데 눈치 없는 봄은 대지에 비를 뿌리고, 라일락 꽃을 피우는 모습에 역설적으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꽃다운 아이들이 아직도 차가운 바다에 버려진 채 돌아올 소식이 없는데 창밖의 새들은 눈치 없이 노래하니 너무나 잔인한 4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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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아름다운 동행 | 2014-04-20 |
1907년 제1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명은 서경조,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한석진, 양전백입니다. 이들 7명은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됩니다. 이들 7명이 목사안수를 받기까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분들은 미국 북장로회,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에 속한 선교사님들이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이들을 가르치면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졸업 후 목사안수를 받을 때 소속을 어느 나라 장로교에 두느냐였습니다. 자신들이 속한 선교 본부에서는 선교업적 때문에 무조건 자신들의 소속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사님들은 이 문제를 놓고 2년간 기도합니다. 기록에 보면 목사안수는 1907년인데 회의는 1905년부터 시작합니다. 선교사님들은 모두가 각자의 주장을 내려놓고 조선 장로교는 하나로 한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봅니다. 당시 선교사님들은 선교 업적을 놓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국의 선교 본부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하나의 장로교를 만들려고 노력을 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는 오분 사열되어 서로 싸우는 꼴이 되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님들의 열정과 하나의 장로교회를 만들려는 역사 인식은 사라지고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며 분열되는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초 목사안수를 받은 7인중 양전백 목사님은 평안북도 선천읍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셨는데 얼마 후 후배인 김석창 목사(4회졸업)가 목사안수를 받자 선천읍 교회를 남교회와 북교회로 분리하여 선천읍에서 함께 목회를 하셨습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교회를 분리한 것입니다. 또한 양전백 목사님과 김석창 목사님은 함께 힘을 모아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세워 한국에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두 분 목사님이 함께하여 세운 신성학교 출신들을 보면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 서울대 총장 장리욱 박사, 경북대 초대총장 고병간 박사, 의사인 장기려 박사, 차병원의 차경섭 박사, 사상계의 장준하 선생, 총신의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세문안교회의 차재명 목사, 영등포교회 원로 방지일 목사, 세브란스 병원장 문창모 박사, 보이스카웃 창설자 이태환 박사, 등 너무나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었습니다. 싸우는 것 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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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청빈의 마음 | 2014-04-13 |
1481년 성종 12년에 처음 편찬된 조선시대의 지리책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동국(東國)은 중국 동쪽에 있는 나라 조선을 말하며 여지(輿地)는 지리(地理)를 뜻하며, 승람은 ‘모두 볼 수 있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차례 개정 작업을 통하여 1530년(중종 25)에 원본에 신증(新增)이라 표시를 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덩이를 던진 나루터라는 뜻의 투금탄(投金灘)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지금의 행주대교 근처의 양천나루터입니다. 이 나루터에 이억년(李億年)과 이조년(李兆年)이라는 형제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형제는 강변에서 금덩이 두 개를 주어 서로 한 덩이씩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습니다. 형이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금덩이를 가지게 되자 형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고 형이 가진 금덩이에 욕심이 생겨 자신의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도 형제의 우애를 생각하고 자신의 금덩이를 강에 버립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곳의 이름을 투금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벡(1902∼1968)이 쓴 소설중에 <진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입니다. 키노와 조안나는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서 크고 값진 진주를 발견합니다. 이들 가난한 부부가 진주를 소유하게 되자 주변사람들이 찾아와 친절을 베풉니다. 그런데 그 친절 속에는 진주를 탐내는 마음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밤중에 강도가 들어와 진주를 빼앗아 가려하자 그들과 격투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둘이 앉아 이야기하는 중에 진주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진주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멀리 사라지고 오히려 불행한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배를 타고 깊은 바다에 나가 진주를 던져 버립니다. <투금탄>의 두 형제와 <진주>를 바다에 버리는 부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 없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해하는 청빈의 마음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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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하늘나라 비자(visa) | 2014-03-16 |
한국의 어느 젊은이가 2007년 12월부터 2009년10월까지 690일간 아프리카 배낭여행을 하고 나서 여행 개요를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총 39개 나라 방문, 총 이동거리 6만4천Km, 교통비 515만원, 숙박비 354만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39개 나라를 여행 할 때 2개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입국허가서인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무비자의 2개 나라를 제외하고 비자 발급 총비용이 200만원이나 들었습니다. 비자 발급비용이 가장 비싼 나라는 수단으로 145달러 한화 17만정도 들었고 가장 싼 나라는 말리로 3500원 정도였습니다. 교통비가 515만원 들었는데 비자발급 비용이 200만원 들었으니 여행 총 경비 중에 비자비용이 너무 많이 차지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려면 먼저 방문하는 나라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받는 입국허가서를 비자(visa)라고 합니다. 비자(visa)는 라틴어의 vise가 어원이며, 이는 배서하다, 보증하다, 증명하다, 사증(査證)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제1차 세계대전 각 나라에서 스파이의 입국을 방지하기 위하여 출발된 제도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는 미국과 비자 없이 6개월은 자유롭게 여행하는 무비자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여행 목적이 아닌 공부, 사업, 취업등 장기간 체류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합니다. 비자를 받기위하여 서류를 제출할 때 비자신청 비용이 160달러(20만원)나 됩니다. 이 비용은 비자가 나오지 않아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각 나라에 방문하려면 먼저 그 나라에서 방문해도 좋다는 입국허가서인 비자(visa)를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나라, 하늘 나라의 입국허가 비자를 받아야합니다. 미국 비자 비용 160달러, 아프리카 수단 145달러, 그렇다면 하늘나라 비자비용은 얼마나 할까? 그리고 어떻게 받아야할까? 하나님나라 비자 발급 비용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지불해주셨습니다. 다만 비자 발급 과정에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밷후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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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014년 4월 희망의 복음축제 | 2014-03-09 |
<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 >라는 제목으로 목회 칼럼을 오래전에 썼습니다. 이 책은 남양만에서 두레 공동체를 이끄시는 김진홍 목사님이 쓰신 책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분이십니다. 목사님은 대구 계명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본교에서 철학개론을 강의하던 중 학생으로부터 " 교수님, 우리가 일생 생명을 바쳐 따를 진리란 무엇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질문에 충격을 받아 대학 강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진리를 찾아 방황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로부터 성경 에베소서 1장 7절의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는 구절을 소개받아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오랜 세월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시간을 끝내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쳐 목회자가 됩니다. 목사가 된 후 청계천 빈민들의 넝마주이들과 함께 활빈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 하시다가 남양만에서 두레 공동체를 이루었고 구리에서 두레교회를 시무하시다 지금은 동두천두레교회를 시무하십니다. 목사님이 활동하시는 정치적 상황을 다 긍정할 수는 없지만 목사님이 쓰신 책 중 <새벽을 깨우리로다>, <정금 같이 나오리라>, <비전 있는 교회>, <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 >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 새벽을 깨우리로라 >는 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는 제목에서 말하듯이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은 항상 우리를 낙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갖게 됩니다. 목사님 자신이 어려움을 극복한 비전의 사람이기에 이 책의 내용은 더욱 더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4월 한 달 우리교회에서는 <2014년 희망의 복음축제>를 계획하고 강사들을 초청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새로운 결단의 시간을 가지려합니다. 4월11일(금) 오후 8:00시에 김진홍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외 강사님들을 초청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소망의 메시지를 들으려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회복의 기회로 삼고 또한 주변에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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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1운동과 기독교 | 2014-03-02 |
1919년 3월 1일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민족이 일본에 항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날입니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독립 국가임을 세계에 선언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는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대부분 목사님들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1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서울에서만 만세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어 거국적 만세운동이 되었습니다. 피해 규모는 조선총독부의 공식집계가 시위참가자 1919년 1년간 202만 명, 시위 횟수 1,542회,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47개가 불에 탔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습니다. 50명 이상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이 전국에서 311개 지역인데 그중 기독교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이 78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한 지역이 42개 지역이었습니다. 6월30일까지 투옥된 사람이 9,458명중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인구 비례로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국 인구가 1600만이었는데 기독교 인구는 20만 명으로 전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세 운동지역의 38%가 기독교인이 주도했습니다. 또한 투옥된 사람의 22%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이 1.3%밖에 되지 않았지만 3.1운동의 주체적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3.1운동의 시위가 한창일 때 전국교회에 통고문을 보내면서, (1)매일 3번 기도하고, (2)주일은 나라를 위한 금식, (3) 1주일간 주제를 정하여 성경읽기를 했습니다. 월요일-이사야10장(앗시리아에 대한 심판), 화요일-렘12장(유다 멸망의 원인), 수요일-신28장(이스라엘 백성의 축복), 목요일-약5장(고난중 인내),금요일-사59장(회개와 구원),토요일-롬8장(고난후 장차 영광)을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고 핍박 중에도 만세운동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3.1만세운동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선조들의 믿음을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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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제중원(濟衆院) | 2014-02-23 |
광혜원(廣惠院)은 1885년 4월 10일 서울의 재동(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입니다. 당시 궁중 시의관으로 있던 알렌 선교사의 건의에 의하여 고종황제가 설립을 허락하여 세워졌습니다. 광혜(廣惠)란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궁중을 중심으로 한 병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광혜원을 개원한지 16일 만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변경합니다. 통리교섭통상아문은 제중원을 외교부 관할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제중원을 담당했던 알렌과 헤론, 에비슨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운영상 어려움이 발생하여 1904년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L.H. Severance)의 도움으로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 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병원건물을 세워 오늘날의 세브란스 병원이 됩니다. 6.25전쟁 후 어려운 과정을 거쳐 1957년 연희대학과 합병하여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제중원의 제중(濟衆)이라는 말은 논어의 옹야(雍也)에 “만약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민중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어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라고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널리 백성에게 베풀며 구제 한다”는 뜻합니다. 제중원은 개원한 첫해 환자의 수가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제중원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자들 치료했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주 출신 김재원은 1903년쯤 폐질환으로 찾아와 오른쪽 늑골 전부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고 치료하는 중 예수를 믿게 되어 고향 제주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오늘의 금성교회가 된 것입니다. 1907년 이기풍목사가 제주에 파송되기 전 제주에는 이미 김재원에 의하여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또한 제중원에서 배운 백정출신의 박서양은 신분의 벽을 넘어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의사가 됩니다. 이처럼 제중원은 병들어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쁨을 주었고, 백정 출신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희망의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제중원의 뜻을 기리어 < 병든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치며 구제>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인 박시제중(博施濟衆)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해야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