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 menu line

목회칼럼

No제목 등록일
449현재(現在) 2024-01-28
동기 중에 송광택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크리스찬 북뉴스 편집 고문,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 바울의 교회 글향기 도서관 담당 목사님으로 총신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독서운동에 평생을 바친 존경스러운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이 가끔 카톡으로 신간 서적을 소개하며 서평을 보내줍니다. 평소 책 읽는 일을 게을리하다가도 카톡으로 보내주는 신간 소식을 접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목사님께서 지난 주간에 카톡으로 프랑스 철학자이며 작가인 장 그르니에(1898-1971) ‘산다는 것은?’이라는 시와 함께 작가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 산다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밖에서의 삶은 없다.
지금 이 순간의 빛과 그늘, 땅과 나무 냄새,

그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을
충만하게 끌어 안아라.

지금 이 순간을 꽉 끌어안지 않는다면
어떤 삶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끌어 안아라

장 그르니에의 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시간에 중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 나에게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또한 미래가 아무리 희망적일지라도 미래는 미래입니다. 결국 과거나, 미래가 나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 오늘의 현재가 나의 삶의 중심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을 누리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멋진 삶이며 행복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라틴어 <카르페 디엠 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 즐기라>의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오늘 이 순간에 충실하며 현재의 삶을 누리며 삽시다.
448만남의 예배 공동체 2024-01-21
우리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가 쓰기 시작한 용어로 산업의 급진적 변화를 말합니다. 1차 산업혁명은 18세기의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산업의 동력이 생겨 가내 수공업의 형태에서 기계화된 공장의 제품들이 나오게 되었고, 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전기의 발명으로 산업 동력이 증기기관에서 전기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3차 산업혁명은 20세기 컴퓨터의 발달로 표현됩니다. 컴퓨터의 발달은 그동안 점진적으로 발전 계승되어 오던 인류문명의 근원을 송두리째 변화시켰습니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2016년 세계경제인 포럼(WEF)에서 언급된 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 인터넷, 나노기술 등을 말합니다. 특히 인공지능의 AI는 컴퓨터가 생성된 자료에 의하여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인공지능(AI)의 초기 시대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AI의 발전은 미래사회가 어떻게 발전될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AI의 가장 대표적인 실례가 2016년 구글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국이었습니다. 바둑의 모든 경우의 수를 빅데이터로 분석하여 가장 정확한 수를 놓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AI의 분석은 자동차에 장착하여 자율주행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상담학까지 적용되고 있습니다. 피상담자가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면 AI가 그동안 상담되었던 모든 경우의 상황을 분석하여 피상담자의 고통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해결책을 간단명료하게 지적하고 답을 주는 AI 상담학으로 발전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전된 인공지능 시대라고 하지만 AI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마음을 나누는 공감하는 시간입니다. 예배 중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어찌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이 발달된 시대가 온다고 해도 인간은 함께 만나 마음과 마음을 소통하는 공감의 시간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특히 예배 중 교제가 더욱 강조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참된 교회는 함께 이루어 가는 예배 공동체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이해하며 교통하고 공감하는 원천의 본질인 성령 충만을 우리는 항상 소원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447위로하시는 주님 2024-01-14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찬송가 369장의 가사입니다. 이 찬송가는 아일랜드 출신 조셉 M. 스크리븐(Joseph Medlicott Scriven 1819-1886)이 캐나다에서 작사한 것입니다. 영어로 "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의 제목의 시를 번역한 것입니다. 작사자 스크리븐은 아일랜드의 더블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842년 대학을 마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결혼식 전날 밤 그의 신부가 수영장에서 사고로 익사했다는 비극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후 슬픔에 방황하다가 1844년 25세의 나이에 그는 고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하여 온타리오주 우드스톡에 정착했습니다. 그의 남은 삶은 언제나 이웃을 돕고 고아와 불행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작사한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라는 찬송 시는 훗날 작곡가인 Charles C. Converse에 의하여 작곡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어진 찬송가가 됩니다. 특히 무디 부흥 운동 때 생키(Sankey)에 의해 불려진 찬송가로 유명합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세상에 삶을 살다 보면 우리를 근심하고 걱정하게 하는 문제가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위로하시는 주님이 친구처럼 옆에 있으니,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도 주님이 함께하면 견디어 내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크리븐은 결혼식 전날 신부가 죽는 불의의 사고로 큰 실망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에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갑작스러운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에 대하여 초연하고 당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하며 소망 중에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446인생찬가 2024-01-07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는 미국의 시인입니다. 그가 쓴 시중에 <인생찬가>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입니다. 2024년 새해 아침에 우리의 인생을 한 번 생각하면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면 관계상 전문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롱펠로우가 전하려는 뜻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A Psalm of Life(인생찬가)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라. /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 만물은 외모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빠르다. / 우리의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
무덤 향한 장송곡으로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 인생의 진영 안에서 /발 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 /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 중간 생략 ---------
일어나 부지런히 일해 나가자 / 어떠한 운명일지라도 저항할 의지를 지니고 / 끊임없이 성취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 일하고 기다리기를 힘써 배우자
445경건회복 2023-12-31
202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옛 것을 보내며 새로운 것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결단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2024년 목회계획의 목표는 마음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로 향하자는 뜻으로 <경건회복>에 두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속(俗 secular)된 것을 버리고 거룩한 성(聖 holy)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 430년)는 4세기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로마에서 활동한 교부 신학자입니다.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늘 자신의 경건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오셔서 /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시옵소서. / 그리하여 모든 죄악된 생각을 버리고 / 유일한 선의 근원이신 주님만 모시고 살게 하옵소서. / 오! 하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 하나님이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하옵시고, / 나는 너의 구원이라고 내 영혼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나의 심령을 맡기오니 그 귀를 여셔서 /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시고 / 그 음성만 따라서 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본 받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1380-1471)는 경건을 위한 기도를 이렇게 드렸습니다 . “오 주여,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시며, /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을 찬양하게 하시고, / 당신이 보시기에 값진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게 하시고, / --- 눈에 보이는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참된 판단을 분별 있게 내리도록 하시며,/ 무엇보다도 항상 당신의 뜻에 무엇이 정말로 즐거운 것인가를 묻게 하소서”
202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하는 시간에 지난 것은 잊고 2024년에는 우리 모두 더욱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편 32:6)
444경건 회복 2023-12-17
우리는 종종 회복(回復)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의 뜻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좋은 상태를 되찾았다고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수술 후 건강을 회복했다, 어려운 금융위기에서 경제가 회복되었다, 북한과 적대적 관계에서 새로운 대화로 대북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등 옛날의 좋은 상태로 되돌아갔다고 표현을 할 때 회복(回復)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회복이라는 말을 종종 씁니다. 경건 회복, 은혜회복, 말씀회복, 감사회복 등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요즈음 2024년 목회계획을 세우면서 2024년에는 말씀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경건을 회복하라”는 표어를 묵상합니다. 2024년에는 우리 모두 경건을 회복하고 은혜를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 430년)는 4세기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교부 신학자입니다.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늘 자신의 경건회복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죄악된 생각을 버리고 /유일한 선의 근원이신 주님만 모시고 살게 하옵소서. / 오! 하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하옵시고,
나는 너의 구원이라고 내 영혼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나의 심령을 맡기오니 그 귀를 여셔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시고 /그 음성만 따라서 살게 하옵소서----”

요즈음 우리는 코로나로 신앙이 나태해져 예배와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 이전의 열심과 은혜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있었으면 합니다. 경건회복을 최우선 생각하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예배에 집중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편 32:6)
443다양한 생각 2023-12-10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화 속에 등장하는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일을 하여 양식을 충분히 저장해 두었기에 추운 겨울이 닥쳐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노래하며 놀기만 했기에 추운 겨울이 오면 먹을 양식이 떨어져 어렵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솝우화의 내용을 살짝 비틀어 각색하여 다양한 교훈을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새롭게 각색된 이야기 내용을 보면, 개미는 여름내 일만 했기에 허리에 디스크 병에 걸려 움직일 수 없어 수술하여 병원에 입원합니다. 이때 노래 잘하는 베짱이는 입원해 있는 개미들에게 거액의 공연비를 받으면서 위문공연을 합니다. 이렇게 베짱이는 노래를 하면서 겨울을 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우화의 교훈은 개미처럼 일만 하지 말고 적당한 휴식을 취하라는 내용입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 뿐 아니라. “여우와 신포도”의 이야기도 새롭게 각색을 합니다. 본래의 이솝우화는 배고픈 여우가 포도를 따먹으려 하는데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 있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따먹을 수 없게 됩니다. 여우는 돌아서면서 ‘저 포도는 맛없는 신 포도야’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각색한 우화는 여우가 여러 차례 노력하여 결국 포도를 따먹습니다. 이때 주변에 있던 여우들이 박수를 치며 부러워하니 여우는 ‘아 달다’ 하며 기쁜 표정을 짓습니다. 속으로는 신포도 맛에 배가 아파 죽겠는데 여우들의 박수 소리에 계속하여 포도를 먹다가 위궤양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성공했다고 남들에게 박수를 받지만 실상은 마음 한구석에 고통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현대인들을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그 뿐 아니라 “팔려 가는 당나귀”는 장사꾼을 불러서 집에서 판다는 내용과 “나그네 외투 벗기기”의 바람과 해의 대결에서 거센 바람이 외투를 벗지 않으면 몸통째 날려버린다는 이야기 등등....
현대사회는 이처럼 이솝 우화를 다양하게 각색하여 자신의 개성을 들어내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시대에 지혜롭게 살려면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각각의 존재를 존중하고 소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442용납하고 하나 되는 공동체 2023-12-03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경읽기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금요일 12월 1일에 바울서신 에베소서를 읽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엡 2:1-10절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 진리는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값없이 얻는 것임을 강조하는 대표적 구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왜 에베소 교회에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강하게 표현하며 가르쳤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세웠고 3년 동안 목회한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 중에 애정이 가는 교회입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교리적 분열로 서로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옥중서신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구원 진리를 강조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 얻은 것이 우리의 행위로 얻은 것이라면 교회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값없이 얻은 구원이기에 교회 안에서 누구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엡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는 화목하며, 성령이 하나 되게 하는 줄로 서로 연결하도록 매고 서로 평안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일치하고 하나 되려면 ‘인내하고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교회 안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하다 보면 서로가 불편합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를 계속하다 보면 분쟁이 일어나고 교회가 분열되게 됩니다. 참된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가 믿음이 부족하여 그 행위가 어린아이 같아도 서로 용납하고 화목하고 일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일치하는 하나 되는 공동체입니다.
441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 2023-11-26
지난 주간에 산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집입니다. 1979년 초판 발행 후 2022년 개정으로 16판을 찍은 유명시인의 시집입니다. 시집의 전체 시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슬픔 많은 이 세상에도’라는 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찬찬히 읽어보면서 시인이 표현하려는 슬픔의 뜻이 좋았습니다. 시인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슬픔을 가지고 산다. 그렇다고 주어진 슬픔 때문에 고귀한 인간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슬픔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기다리고 기다리면 슬픔은 사라지고 행복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슬픔이 많은 세상에도’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첫눈 내리는 새벽 눈길 걸을 것이니
지난가을 낙엽 줍던 소년과 함께
눈길마다 눈사람을 세울 것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나러 돌아올 것이니
살아갈수록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
평등의 눈물들을 보여주면서
슬픔으로 슬픔을 잊게 할 것이니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
부질없이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 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
슬픔이 있는 사람이라고 늘 슬퍼만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다 보면 슬픔이 슬픔을 잊게 해 줄 것입니다. 또한 봄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며 슬픔이 있는 사람끼리 위로하며 살다 보면 슬픔 많은 세상도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렵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다 보면 슬픔의 현실이지만 산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440무제(無題) 2023-11-19

허전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주간에 오랜만에 서점에 갔습니다. 책 두 권을 샀습니다. 한 권은 제목에 끌려 샀고, 한 권은 유명 시인의 시집을 샀습니다. 제목에 끌린 책은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입니다. 프랑스 심리전문가 크리스텔 프티콜랭이 쓴 책입니다. 현대인들은 생각이 많고 정신을 과잉 사용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스스로 피곤해한다는 관점의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책 소개를 하면서 <생각 과다, 감정 과잉, 감각 과민--- 모든 게 넘치는 당신에게 필요한 ‘적당히 요령 있게’ 세상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나는 제2장에서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정신적 과잉 활동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중심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제5장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이야기도 있다’처럼 더러는 덮어두고 사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세상 모든 일에 끼어들며 자기만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신 과잉 사용자들입니다. 조금은 남의 일을 외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집을 읽으며 ‘맹인 부부 가수’라는 시가 감동을 주었습니다. 겨울밤 눈 내리는 거리에 맹인 부부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고 눈사람을 만들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합니다. 봄이 오면 눈사람은 녹지만 희망의 눈사람은 봄이 와도 녹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합니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는 눈사람 되었네> 너무나 감동의 표현입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희망의 눈사람, 어떤 상황에도 녹지 않는 눈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녹지 않는 눈사람의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희망을 노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