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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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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이 마음을 품으라 2025-03-30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이자 목회자였던 찰스 스펄전은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 이었습니다. “나는 설교할 때 곧장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며,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식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예수님을 떠올리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어떠한 마음의 울림이 없습니다. 메마른 심령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을 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2:5)
식어 버린 마음을 대신하여 새로운 마음, 곧 ‘이 마음’을 품기를, 갖기를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당시 바울이 처해 있던 환경은 ‘옥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 또한 빌립보서의 주제가 되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비록 감옥이라 할지라도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는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 행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갖게 되는 참된 기쁨이자 행복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507교회와 가정을 잇다 2025-03-23
“애들은 소유가 아니에요. 많이 사랑해 줘야죠. 크리스천 부모들이라면, 청지기로서 아이들이 스무 살 넘으면 하나님 자녀로 잘 파송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죠. 그러려면 '이 나이에 무슨 꿈이야' 할 게 아니라 부모들도 꿈을 꾸셔야 해요.
인간이 인간을 가르쳐서 변화되는 일은 많지 않아요. 우리가 품을 수 있을 때 품고, 같이 품고, 서로 품고 연대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죠. 아이가 꿈꾸게 하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게 아니라, 같이 꿈꾸면서 가시면 좋겠어요. 이렇게 하면 '보상심리' 때문에 힘들지 않으실 거예요. 이만큼 투자했으니 이만큼 뽑아내야 하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같이 한 살이 되는 거라고 해요. 같이 태어나서 같이 꿈꾸고, 같이 어린아이가 되기도 하고, 도움을 줄 때는 함께하고 연대하는 가정이 되면 좋겠어요."
(오선화 작가 인터뷰 중에서, 크리스천투데이)

일찍이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이자 멘토였습니다. 한 사람의 신실한 목회자, 디모데가 세워지기까지 이러한 영적 멘토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의 신앙이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까지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온 신앙의 유산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바울과 같은 훌륭한 영적 멘토와의 만남이 더해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위대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가정을 잇는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은 비단 교회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정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와 가정이 하나 되어 함께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사명, 즉 ”요나단의 비전으로 다윗을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가정, 그리고 자녀를 잇는 통합적인 신앙 교육을 통해 오늘날의 디모데, 그리고 다윗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506그리스도인 바나바 2025-03-16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로 시작되는 시 133편은 하나님의 축복과 영적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이’ 축복이 개인을 통해 공동체 전역으로 흘러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나바’라는 인물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역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이름보다는 별명, 즉 ‘바나바’로 불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나바의 본래 의미와 같이 그는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위로의 사람, 축복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성경 본문은 사도행전 11장 1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첫 번째로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나바의 첫 번째 이미지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신앙을 소개하기 앞서서 인격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성품과 인격이 어떠했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장)를 통해 말해주고자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진정한 친구인가’, 더 나아가 ‘과연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이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신분이나 조건이 아닌, 하찮은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착한 성품과 행동’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주는’ 바보처럼 보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미련해 보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자 진리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505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2025-03-09
선지자 하박국은 부흥에 대한 갈망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합3:2)
이 구절에서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수년 내’ 라는 숫자일 것입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부흥을 맛볼 수 있다면....’ 누구나 꿈꾸고 바라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바랐던 참된 부흥은 ‘숫자’(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빨리’ 부흥되기를 바랐다기보다는 ‘진정한’ 부흥을 열망하였던 것입니다. 앞서 그는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2:3)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빠른’ 부흥이 아닌, ‘바른’ 부흥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부흥하다’는 히브리어로 ‘하야’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살다, 살아내다’ 입니다. 부흥은 근본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 즉 필연적인 생존의 문제입니다. 마치 우리의 호흡이 멈추게 되면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부흥은 곧 영적인 호흡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양적인) 확장과 (숫자상의) 성장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겔 37장에서는 부흥의 시작이 ‘호흡’(생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러 넣으시게 되었을 때, 살아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기’가 곧 ‘호흡’(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불게 되었을 때, 아무런 소망 없는 마른 뼈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살아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하야’입니다. 곧 ‘부흥하다’입니다.

결국 참 부흥의 의미를 깨닫게 된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3:17). 부흥은 숫자(양)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이 깨달은 부흥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심령을 채우게 될 때, 비로소 영혼의 부흥이 있게 됩니다.
504'안정'과 ‘안주’ 2025-03-02
구약의 역사는 ‘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의 중심에는 ‘땅’이 있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 비전을 품고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이스라엘 역사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그 땅에서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고, 이방의 신들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도 그들을 떠났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의 신앙이 안주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시도 앞에서 안정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안정을 위한 노력이 자칫 안주하도록 만듭니다.

이스라엘 지역에는 ‘사해’ 라는 바다가 있습니다. 사실 바다라기 보다는 내륙 가운데 있는 큰 호수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호수와는 다르게 바닷물처럼 짠맛을 내기에 오래전부터 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염분의 농도가 바닷물의 7배에 달할 정도로 짙습니다. 그래서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몸이 뜨게 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휴양지이기도 합니다. 비록 바닷물처럼 짠맛을 낸다고 하더라도, 사해는 고여있는 담수호입니다.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 즉 ‘사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새로운 시작을 하는 즈음에 있습니다. 변화와 도전 앞에서 안주하게 될 때, 영적인 ‘사해’처럼 될 것입니다. 결코 ‘축복’은 고인 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흐르는 강물이 되어 교회와 가정에까지 흘러넘쳐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503온전하여지다 2025-02-23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15세기 수도사로 평생을 경건에 힘썼던 사람입니다.
경건한 삶을 위해 그가 강조한 것은 ‘채움’이 ‘비움’이었습니다. 또한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더욱 유익함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5장 21절 이하에는 두 여인에 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에게 존경과 신망을 받았던 위치에 있던 사람이 회당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회당장의 사랑스런 딸이 죽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또 한 여인은 정반대의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던 사람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입니다. 당시 혈루증은 단순한 육체적인 질병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여인을 멀리하였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부 생활도 할 수 없었으며, 가족들조차 외면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반대의 환경에서 살았던 두 여인에게서 공통점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저자 마가가 주목하였던 유일한 공통점은 ‘열둘(12)’이라는 숫자였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과 죽음의 위기에 처한 ‘열두 살’ 소녀입니다. 숫자 12는 유대인의 관념상 가장 이상적인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열두 해 동안 병을 낫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열두 살 소녀는 부모의 완전한 보호 아래 양육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병은 더 중하여졌고, 소녀는 죽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실패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회당장은 딸에게 ‘주님의 손을 대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손끝(옷자락)이 닿는 것 만으로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단순한 믿음의 행동을 통해 그들은 온전하여졌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 그저 딸의 몸에 손만 대어달라고 간구하는 것, 하지만 이러한 단순함이 기적을 만듭니다.
502고난이 주는 선물 2025-02-16
『고통이라는 선물』(폴브랜드, 필립얀시 공저)은 폴브랜드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는 저명한 의사이자, 의료선교사였습니다. 특히 평생을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나병인을 위해 그가 주고 싶었던 최고의 선물은 ‘고통’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손가락 마디가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통 혹은 고난은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에게도 염려와 근심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후반부에 보면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태장에 맞기도 하며,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았습니다.’ 이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러한 고통 앞에서 당연히 두려움과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근심은 이런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근심은 ‘교회를 위한 염려’(고후11:28)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교회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압박감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는 진정 주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핍박으로 인해 교회가 고난당하는 상황을 보면서 염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히4:15).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했습니다. 아파본 사람이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이 누군가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로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도 유익합니다. 고난은 선물입니다.
501주의 날개와 옷자락 2025-02-09
이삭 줍는 여인, 룻의 이야기는 단순한 한 인간의 성공 스토리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이 없는 ‘청상과부’ 이자, 이방 여인이 유대 땅으로 건너와서 유력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이 역전하게 된 이야기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룻기는 한 유대인 가정이 모압으로 이민 오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극심한 가뭄과 가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방 땅으로 오게 되었지만, 불과 십 년 만에 이민생활은 실패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이후에 두 아들도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았을 뿐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모압 사람이었던 두 며느리에게 가족에게로 돌아가 새출발 하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친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룻의 입장에서는 굳이 시어머니를 따라 타국으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유대는 낯선 타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압사람을 대하는 유대인의 차별적인 시선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부담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오미와 함께 할 것을 다짐하며 결단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

룻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나오미를 따라 가는 것은 그녀의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녀는 모압의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유대를 향해 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룻은 믿음에 따라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유대에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신 것도, 그를 통해 나오미와 자신의 가문에 ‘기업 무를 자’가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마침내 룻과 보아스 사이에 오벳이 태어났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주의 날개와 옷자락’(룻2:12,3:9)으로 룻과 나오미를 보호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축복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500인생을 담다 2025-02-02
성경을 살펴보면 음식 또는 요리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야곱이 요리한 팥죽’이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둘은 쌍둥이였지만 전혀 다른 성격과 기질을 타고 났습니다. 에서는 외형적이고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고 집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몹시 허기지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팥죽을 요리하고 있던 야곱에게 한 그릇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고,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과 맞바꾸게 됩니다. 결국 팥죽 한 그릇으로 시작된 에서와 야곱의 축복에 관한 권리는 동생 야곱에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25:34)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비록 팥죽 한 그릇이라 할지라도 ‘인생요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야곱과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이 임하였던 것을 보게 될 때, 보잘것없는 작은 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인생을 담아 하나님께 드릴 때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열왕기상 17장에도 ‘인생요리’가 등장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요리를 하여 아들과 먹고 죽고자 하였을 때, 먼저 그것을 자신에게 만들어 달라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청에 순종하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요리라고 부르기에는 하찮은 떡 한 조각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요리를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 주었을 때, 떡 반죽 그릇에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채워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말씀에 따라 아합왕 앞에서, 그릿 시냇가로, 그리고 사르밧으로 갔을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셨고 예비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의 삶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인에게도 돌보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먼저’ 순종하면 ‘그 후에’ 책임져 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499불쌍히 여기사 2025-01-26
오병이어 기사는 예수님의 가장 대표적인 이적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기사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병이어 기사에는 예수님께로 모여든 수많은 군중이 등장하는데, 그들을 가리켜 ‘큰 무리’ 라 지칭하고 있습니다(막6:34). ‘큰 무리’의 특징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행하셨던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당시의 ‘큰 무리’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기적’ 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단지 오병이어, 즉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수만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현상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그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무리’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육체의 양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심정은 “불쌍히 여기사” 였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그 뜻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나 동정, 슬픔’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심정으로 무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후에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으로 그들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은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