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 menu line

목회칼럼

No제목 등록일
514다시 빛으로 2025-05-18
누가복음 9장에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담겨 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는 과거 구약을 대표하는 두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현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두 선지자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즉 가까운 미래에 있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변화산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장차’ 있을 십자가 사건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 역사에 모든 초점이 맞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시선은 ‘현재’에 머물러 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33절)

변화산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변모하게 되신 것입니다. 용모가 변화되고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곧 빛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의 빛’ 이라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온 우주가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차 있을 때, 시작을 알리는 한마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창1:3). 그리고 요한복음이 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곧 말씀이자, 빛이 되십니다.

이와 같이 빛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또한 빛은 우리를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됩니다(시119:105). 그리고 빛은 어둠의 불의를 밝히는 ‘진리’가 되어 줍니다(요8:32). 그러므로 또 다른 시작을 향해 가는 우리 공동체는 다시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빛 되신 주님과 동행하는 참된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513다시 복음으로 2025-05-04
신약성경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보를 읽으면서,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자연스럽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복음서를 시작하는 이 부분이 갖는 중요한 상징성이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이 내용을 기록한 중요한 목적과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복음의 중요한 특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특징은 ‘복음은 연속성을 갖는다’ 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보가 구약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담의 계보는 ‘죽음’ 으로 끝을 맺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계보는 ‘죽음’ 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고, ‘낳고’ 또 ‘낳고’ 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의 계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사망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닌, 영생으로 연속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복음의 확장성’입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회 통념상 문제가 있는 다섯 여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제한받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완전성을 갖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참된교회는 은혜 가운데 지난 55년을 지나왔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는 이후로 50년 또한 동일한 은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은혜의 반세기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우리 공동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다시 복음 앞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512부활 후에 2025-04-27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과 행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행전의 대전제는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전제가 거짓이라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증인들의 증언 또한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과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폭력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신념을, 즉 믿음을 지켜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증인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며 말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필 십자가에 못 박힌 중죄인을 믿느냐’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세상의 시선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주이고, 실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1)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증인들은 가장 미련해 보이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뜻인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을 삼기 위해’(행1:8) 먼저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주님의 명령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먼저 부르심에 순종하게 될 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께서 불어 넣어 주십니다. 오순절 그날처럼 말입니다.
511고난받는 종의 노래 2025-04-20
이사야 53장은 대표적인 메시아 예언장입니다. 비단 이 본문뿐만 아니라 이사야에는 메시아 예언에 관한 여러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53장은 메시아에 대해서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찔리고 상함을 받는 고난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실 것으로 이미 700여 년 전부터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들어오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태어나면서부터,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보내셨고, 이후에 3년간의 공생애를 ‘참 사람’이 되어 보내셨던 이야기가 사복음서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마가복음은 이사야에서 예언한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이러한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 즉 ‘고난’에 주목하였던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연대는 A.D 50-7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가는 로마에서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시기 로마는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한 때이기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신앙인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위로’의 메시지, 즉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핵심은 ‘예수님께서도 고난 당하셨다’ 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고난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 지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영광스런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난 뒤에는 영원한 승리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에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감당할 만큼의 고난만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이 우리를 괴롭힐 때, 한 번 더 떠올리길 바랍니다.
‘주님도 고난 당하셨습니다’
510십자가에 못 박다 2025-04-13
우리는 늘 가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가장 멀리 있는 십자가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5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결국 ‘우리 때문에’ 짊어지신 십자가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또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켜내며, 마침내 승리하게 되었다는 사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결론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는 12장을 시작하며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결국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다’의 원어상의 의미는 ‘(어떤 것에) 고정시키다’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갔을 때 그 또한 물 위를 걷게 되었지만, 잠시 눈을 돌려 풍랑을 바라보는 순간 깊은 바다로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고정되어야 합니다. 한눈파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예수님만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순간도 한 눈 팔지 않고 예수님께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을 고정하셨습니다. 양손과 발에 못을 박히면서까지 십자가에 모든 것을 고정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너희도 못 박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예수님을 바라만 보기를, 그 분께 시선을 고정하도록 요청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509나를 누구라 하느냐 2025-04-06
초대교회 당시 많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핍박 아래서 성도들만의 표식이 필요했는데, 물고기 문양의 기호였습니다. 헬라어 ‘익투스’(ΙΧΘΥΣ)는 물고기를 뜻합니다. 익투스는 다음의 다섯 가지의 단어의 앞 글자를 따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①Ιησουζ(예수스=예수) ②Χριστοζ(크리스토스=그리스도) ③Θεοζ(테오스=하나님)
④Υιοζ(휘오스=아들) ⑤Σωτηρ(소테르=구세주)

이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 했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고백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고, 다양한 자리에서 봉사하며 교회를 섬겨왔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히 많은 시간 성경 공부를 하며, 여러 권의 신앙 서적을 읽음으로써 예수님에 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시몬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고백은 ‘지식적인 앎’이 아닌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얻게 된 ‘믿음’ 이었습니다. 믿음은 곧 ‘생활’입니다. 생활 가운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마16:17)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508이 마음을 품으라 2025-03-30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이자 목회자였던 찰스 스펄전은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 이었습니다. “나는 설교할 때 곧장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며,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식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예수님을 떠올리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어떠한 마음의 울림이 없습니다. 메마른 심령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을 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2:5)
식어 버린 마음을 대신하여 새로운 마음, 곧 ‘이 마음’을 품기를, 갖기를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당시 바울이 처해 있던 환경은 ‘옥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 또한 빌립보서의 주제가 되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비록 감옥이라 할지라도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는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 행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갖게 되는 참된 기쁨이자 행복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507교회와 가정을 잇다 2025-03-23
“애들은 소유가 아니에요. 많이 사랑해 줘야죠. 크리스천 부모들이라면, 청지기로서 아이들이 스무 살 넘으면 하나님 자녀로 잘 파송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죠. 그러려면 '이 나이에 무슨 꿈이야' 할 게 아니라 부모들도 꿈을 꾸셔야 해요.
인간이 인간을 가르쳐서 변화되는 일은 많지 않아요. 우리가 품을 수 있을 때 품고, 같이 품고, 서로 품고 연대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죠. 아이가 꿈꾸게 하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게 아니라, 같이 꿈꾸면서 가시면 좋겠어요. 이렇게 하면 '보상심리' 때문에 힘들지 않으실 거예요. 이만큼 투자했으니 이만큼 뽑아내야 하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같이 한 살이 되는 거라고 해요. 같이 태어나서 같이 꿈꾸고, 같이 어린아이가 되기도 하고, 도움을 줄 때는 함께하고 연대하는 가정이 되면 좋겠어요."
(오선화 작가 인터뷰 중에서, 크리스천투데이)

일찍이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이자 멘토였습니다. 한 사람의 신실한 목회자, 디모데가 세워지기까지 이러한 영적 멘토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의 신앙이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까지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온 신앙의 유산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바울과 같은 훌륭한 영적 멘토와의 만남이 더해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위대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가정을 잇는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은 비단 교회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정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와 가정이 하나 되어 함께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사명, 즉 ”요나단의 비전으로 다윗을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가정, 그리고 자녀를 잇는 통합적인 신앙 교육을 통해 오늘날의 디모데, 그리고 다윗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506그리스도인 바나바 2025-03-16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로 시작되는 시 133편은 하나님의 축복과 영적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이’ 축복이 개인을 통해 공동체 전역으로 흘러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나바’라는 인물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역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이름보다는 별명, 즉 ‘바나바’로 불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나바의 본래 의미와 같이 그는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위로의 사람, 축복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성경 본문은 사도행전 11장 1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첫 번째로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나바의 첫 번째 이미지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신앙을 소개하기 앞서서 인격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성품과 인격이 어떠했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장)를 통해 말해주고자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진정한 친구인가’, 더 나아가 ‘과연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이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신분이나 조건이 아닌, 하찮은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착한 성품과 행동’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주는’ 바보처럼 보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미련해 보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자 진리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505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2025-03-09
선지자 하박국은 부흥에 대한 갈망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합3:2)
이 구절에서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수년 내’ 라는 숫자일 것입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부흥을 맛볼 수 있다면....’ 누구나 꿈꾸고 바라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바랐던 참된 부흥은 ‘숫자’(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빨리’ 부흥되기를 바랐다기보다는 ‘진정한’ 부흥을 열망하였던 것입니다. 앞서 그는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2:3)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빠른’ 부흥이 아닌, ‘바른’ 부흥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부흥하다’는 히브리어로 ‘하야’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살다, 살아내다’ 입니다. 부흥은 근본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 즉 필연적인 생존의 문제입니다. 마치 우리의 호흡이 멈추게 되면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부흥은 곧 영적인 호흡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양적인) 확장과 (숫자상의) 성장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겔 37장에서는 부흥의 시작이 ‘호흡’(생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러 넣으시게 되었을 때, 살아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기’가 곧 ‘호흡’(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불게 되었을 때, 아무런 소망 없는 마른 뼈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살아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하야’입니다. 곧 ‘부흥하다’입니다.

결국 참 부흥의 의미를 깨닫게 된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3:17). 부흥은 숫자(양)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이 깨달은 부흥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심령을 채우게 될 때, 비로소 영혼의 부흥이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