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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 2024-11-10 |
‘이름’에는 그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정체성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이름은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화하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에서 ‘열국의 아버지’로 존재의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가 가진 ‘참된’이란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교회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참’이란 우리말은 ‘진리’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진리’라는 이 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여기에서 진리(The Truth)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난 3년간 예수님의 제자로서 곁에서 주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과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 되시는 참 진리(The Truth)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참된(The Truth)교회는 이 진리(The Truth) 위에 굳건히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터전 위에 세 가지 비전을 세워가야 합니다. 먼저는 오직 진리 되신 ‘예수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선포되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또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예배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참된’이란 이름을 가진 우리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와 같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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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말씀 중심의 공동체 | 2024-11-03 |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그 시점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앞서 23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 지냄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결론 맺을 것 같았던 이야기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라는 구절로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새벽에 어떠한 일이 있었나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천사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근심’(4절)과 ‘슬픔’(17절), 그리고 ‘두려움’(37절)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3일 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무덤에 다녀왔던 여인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발걸음은 엠마오로 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길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로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어져 있는’ 그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닫혀 있는 눈과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서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자 비전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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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예배 중심의 공동체 | 2024-10-27 |
요한복음 4장에서는 한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가리켜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 여인’이라 부르거나, 혹 이곳 성읍의 이름인 ‘수가성’이란 지명으로 ‘수가성 여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는 그 성안 우물가 곁에서 만난 여인이기에 ‘우물가의 여인’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길을 지나다 만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이면서도 고의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여인의 인생은 완전히 탈바꿈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는 반드시 변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처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한 남자’(9절)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화 가운데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여인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 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향해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에게는 영적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성전 예배에 대한 편견과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여인과 당시 사람들에게 이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24절). 이것은 진리의 영이 되신 성령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하여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진리와 진심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여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예배자로 서게 해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인에게는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가 수반되게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28절)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인의 전도로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고, 이 여인처럼 그들의 삶도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새로운 변화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예배의 자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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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예수 중심의 공동체 | 2024-10-13 |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히브리어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연못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 먼저 뛰어든 사람은 어떠한 병이라도 고침을 받게 되는 기적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 병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한 병에 걸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연못에 뛰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첫 마디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였습니다. 주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렇습니다. 내가 낫기를 원합니다’ 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갔습니다’라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말투였습니다. 사실상 베데스다는 이와 같은 불만과 분노로 쌓인 병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습니다. ‘자비의 집’이란 이름과는 동떨어진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이 연못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못에 먼저 뛰어 들어간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병 고침을 받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고침을 받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의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했던 불만 섞인 말투와 태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고쳐준 것은 베데스다 연못이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병자가 연못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병자가 고침을 받은 까닭은 그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베데스다, 즉 자비와 은혜의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단지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장이 될 뿐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곧 교회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교회 어느 장소 어느 때든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참된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길 소망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키가 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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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요나단의 비전 | 2024-10-06 |
성경에서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순수한 열정’을 바탕으로 한 만남이었습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블레셋)”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 안에는 의로운 분노가 타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순수한 열정’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삼상 18:1) 이와 같은 ‘순수한 열정’과 ‘순수한 열정’이 더해지게 되었을 때, 놀라운 축복된 만남이 되었습니다. 신분과 배경을 초월한,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예비된 만남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만남이 어느 때보다 순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 끝에 지금의 만남이 있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는 참된교회의 또 다른 도약과 부흥을 꿈꾸고자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이러한 비전으로 다윗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를 위한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인 사울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비전은 훗날 다윗이 위대한 왕으로 세워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요나단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워진 다윗에게는 어떠한 비전이 있었을까요.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역대상 29:11) 그는 단 한 번도 왕의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오직 하나님 되심을 믿고 선포하였습니다. 동시에 성전 건축의 비전을 자신이 아닌 솔로몬을 통해 이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나단이 그리했던 것처럼 ‘내’가 아닌 ‘다음 세대’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것을 소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참된교회 성도 여러분, 요나단과 다윗이 가졌던 비전은 이 교회의 영원한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을 세우기 위해 요나단의 비전이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꿈이 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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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불꽃 같은 인생 | 2024-09-29 |
분당에 있는 새에덴교회는 성도 수가 2만 명이나 되는 초대형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소강석 목사는 우리 교단의 총회장을 지냈습니다. 목사님의 목회 철학 중에 맨손, 맨몸, 맨땅의 3M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쓴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하라>는 책 2장에 “개고기와 소주 사건” 이야기가 나옵니다. 개척 초기 남전도회가 야유회를 가서 개를 잡았습니다. 이때 남전도회 회원들이 개고기를 먹으면서 사이다 병에 몰래 소주를 담아 와서 사이다인 척하면서 목사님 앞에서 소주를 먹었습니다. 이때 어느 집사의 실수로 목사님께 사이다를 따라 준다는 것이 소주를 따라주게 된 것입니다. 사이다인 줄 알고 마시던 목사님이 소주를 마시게 되자 갑자기 밥상을 발로 차면서 ‘어떤 XX 같은 놈’이 목사에게 소주를 먹이냐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너희들 이 자리에서 집사 다 잘라 버린다’고 소리치고는 야유회 중간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한 집사가 술에 취하여 교회로 찾아와 ‘술 한 잔 먹었다고 집사를 자르는 목사가 어디 있느냐’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참다못한 목사님은 그를 옥수수밭으로 데리고 가서 죽기 직전(?)까지 때렸습니다. 분이 나서 ‘너 같은 놈이 집사이기에 한국교회가 요 모양이지’ 하면서 ‘그래 내가 나 복 받으려고 너희에게 술 먹지 말라고 했느냐? 네놈들 복 받으라고 하는 것이지’ 그런데 목사에게 죽도록 맞은 집사가 목사의 폭력을 문제 삼을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난 후 오히려 집사가 목사에게 무릎을 꿇고 ‘목사님 앞으로 잘하겠습니다’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온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소강석 목사의 목회에 대한 열정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내용입니다. 누구나 인생길은 한 번 주어진 여정입니다. 어떻게 살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9월, 가을이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후회 없는 불꽃 같은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용혜원 시인의 <거센 파도로 살고 싶다> 중에서---------내 가슴에 뜨겁게 흐르는 피의 열정으로 오늘을 살겠다. / 한바탕 춤사위로 솟구쳤다 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 거센 폭풍우처럼, 한동안만이라도 뜨거운 열정으로 살고 싶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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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복음의 힘 | 2024-09-22 |
1902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의 어느 교회에 부크맨(Frank N. D. Buchman) 이라는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려운 교회를 담임한지 5년 만에 대형교회로 부흥시켰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과정에서 너무나 앞만 보고 달렸기에 교회는 부흥되었지만, 목사님의 영적 상태는 탈진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자신의 영성회복을 위하여 교회를 사임하고 영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영국을 여행하던 목사님은 어느 날 케스웰이라는 작은 마을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이날이 주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작은 마을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여행 중 주일예배를 의무감으로 시골교회에 참석했습니다. 참석인원은 1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골 목사님이 어찌나 열정으로 설교를 하시었던지 부크맨 목사님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당시 시골 목사님의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희망으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부크맨 목사님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설교를 했고 또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날은 구속의 은총과 부활의 진리가 자신에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목사님은 이날 케스웰의 시골교회에서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훗날 목사님은 이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날의 영적 은혜는 부크맨 목사님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날 이후로 목사님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적 경건 운동을 전개합니다. 목사님이 전개한 영적 경건 운동은 1938년 6월 4일에 세계적인 영적 운동인 도덕 재무장 M. R. A(Moral Re-Armament 절대정직·절대순결·절대무사·절대사랑)운동으로 발전합니다. 도덕 재무장(M. R. A) 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을 중심으로 크게 전개되었습니다. 부크맨 목사님은 여행 중 영국의 작은 마을 케스웰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고, 영성 운동인 도덕재무장(M. R. A)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복음의 힘이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복음으로 새롭게 되어 영적 변화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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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숲을 가꾸듯 가르치라 | 2024-09-15 |
나무 심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장 지오노의 이야기, 천리포 수목원, 남이섬 이야기, 전남 축령산 편백나무 숲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이 이야기입니다. 단편 소설 내용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1913년부터 해발 1,200M -1,300M 프랑스 프로방스 고산지대 황무지에 매일 도토리 100개를 심습니다. 아무 말 없이 홀로 3년 동안 10만 개를 심었습니다. 주인공은 52세부터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지 37년 만인 89세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심은 나무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의 큰 숲이 되었습니다. 충남 태안반도 끝자락 천리포에 우리나라 최초 사립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은 1946년 연합군 중위로 한국에 처음 오게 된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1921- 2002 / 민병갈(閔丙渴-한국귀화)가 1962년 17만 평의 땅을 매입하고 1970년부터 40년 동안 나무와 식물을 가꾸어 13,200여 종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천리포 수목원을 이룬 민병갈 선생과 형제처럼 지낸 민병도 선생 역시 남이섬에 나무를 심어 오늘의 아름다운 남이섬을 만들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큰 결실을 바라고 나무를 심지 않습니다. 그냥 황무지이니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서 큰 이익을 보려는 속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라 했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큰 결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처음 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황무지에 그냥 묵묵히 나무를 심었는데 훗날 큰 숲이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이들이 있기에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훗날 우리가 가르친 아이들이 신앙을 이어가고 복음을 전하는 다음 세대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교회 성도 여러분,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내기를 바랍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심정으로 다음세대를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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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내가 만난 하나님 | 2024-09-08 |
오래전에 썼던 칼럼을 다시 소개합니다. 오늘 설교를 묵상하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설가 김승옥은 1941년 12월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1945년 귀국하여 전남 순천에서 성장, 순천 사건에 아버지 사망,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 1960년에 대학에 입학한 4.19세대, 세종대학교 교수 재직,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 <건>, <환상수첩>, 영화 시니리오로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등을 썼습니다. 1964년 <무진기행> 발표했습니다. 한국 현대문학 대사전에 소설가 김승옥을 표현하기를 “그의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직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 원리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승옥을 극찬하는 평론가들은 30년대 천재 작가 이상과 비교하여 60년대 천재 작가로 평가합니다. 80년대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다가 광주민주화운동의 탄압 그리고 신군부의 검열에 절필을 선언하고 20년간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산문집을 냈는데 제목이 <내가 만난 하나님>입니다. 천재 작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는 고등학교 때 구약성경을 읽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40일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인도 선교에 부름을 받아 신학대학원을 다니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부르심의 소명이 있으면 평범하던 인생도 가는 길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은 체험입니다. 그 체험은 개인의 체험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형식의 만남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건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성경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꿈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설교를 통하여, 어떤 사람은 기도 중에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꼭 하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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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삶의 유일한 원리–성경 | 2024-09-01 |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에는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누(Gnu)라는 초식동물이 있습니다. 외형의 모습은 영양과 비슷하지만, 물소와 흡사한 뿔을 가진 동물로, 떼를 지어 생활합니다. 누(Gnu) 떼들은 집단생활을 하며 푸른 초원의 풀을 먹기 위하여 우기와 건기에 케냐의 마사이마라와 탄자니아의 세렝게티(Serengeti)를 오고 가는 대이동을 합니다. 이들의 이동 거리는 짧게는 500km에서 길게는 1,600km까지입니다. 300만 마리나 되는 거대한 누 떼들의 이동을 연구한 내용 중에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 떼들은 이동 중, 앞에서 가는 누를 보고 무조건 따라서 가는데, 앞에 가는 누가 길을 잘못 들어 위험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뒤따르는 누 떼도 그냥 낭떠러지로 함께 떨어지는 모습입니다. 분명 뒤쫓아 오던 누는 멈출 수 있는데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이러한 누의 행동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 없이 남을 따라가는 부화뇌동(附和雷同)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말만 믿고 따라가면 결국 죄악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사거리 교통 신호등의 고장으로 차량이 뒤엉킨 경우를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호등이 고장 나면 눈치껏 먼저 가려고 합니다. 이런 경우 양보 없이 먼저 가려고 하니 점점 더 차량이 뒤엉키게 됩니다. 차라리 신호등이 없던 곳은 경험에 의하여 서로 양보하며 교통이 원활하게 잘 소통이 됩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호등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만약 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다면 교통사고가 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신호등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은 사거리 교통신호등을 보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누 떼처럼 남들이 가는 길을 생각 없이 가는 사람, 신호등이 고장 났는데 서로 먼저 가려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원리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은 결국 악의 길로 떨어지고, 삶이 뒤엉키는 혼탁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바른 안내자이며 교통 신호등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대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