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No제목 | 등록일 |
---|---|
494만나의 교훈 | 2024-12-22 |
출애굽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여 년 동안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광야 생활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기보다는 버려야 하는 ‘내려놓음’이 필요했습니다. 즉 영적인 미니멀리즘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광야의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독특한 생활 방식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만나’였습니다. 매일 아침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고, 이것이 일용할 양식이 되었습니다. 5일 동안은 한 오멜씩을, 그리고 6일 째는 두 오멜을 거두게 하셨는데, 다음 날이 ‘여호와의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가’(출16:4)였습니다. 따라서 광야는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매일의 만나를 통해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훈련하며 시험받는 곳이 ‘광야’입니다. 비단 광야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장소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대에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살아내기 위해 만나를 통해 주시는 유익한 교훈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출16:12)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요6:35)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곧 만나가 되십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공급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는 분이 하나님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영원한 생명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거친 광야에서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
493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2024-12-15 |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요2:1-12)에서 베푸신 이적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번째 표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일주일간 진행이 됩니다. 그 기간 동안 흥겨운 잔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음식과 포도주는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 그리고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100리터가 넘는 여섯 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할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이나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하인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디아코노스’입니다. 그 의미는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이 잔치를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거나, 적어도 잔치를 주선하는 측에서 사례를 주고 고용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첫 번째 이적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11절) 무엇보다도 연회장을 비롯한 신랑과 신부도 알지 못했던 ‘물이 포도주로 변한’ 예수님의 이적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요20:30-31)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물 떠온 하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9절)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025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해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간증으로 기억되는 새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
|
492여호와의 눈으로 바라보라 | 2024-12-08 |
인생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있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그때 ‘A가 아니라 B를 선택하였더라면’ 이라 생각하면서 후회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정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가족의 문제, 공동체를 위한 결정이라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람과 롯의 선택과 결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그들은 양자택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먼저 조카 롯에게 제안하게 됩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편을 선택하면 나는 왼편으로 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제안에 따라 롯이 먼저 결정했습니다. 그가 바라보았던 장소는 풍부한 물과 초목이 우거진 요단 지역이었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았고 애굽과 같은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은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선택의 결과는 너무도 가혹하였습니다. 그가 선택한 지역은 소돔이었습니다. 얼마 후 롯은 부족 간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모든 재산과 가족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브람의 도움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결국에는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언약이 그를 통해 성취되었고, 그와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과 극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롯은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결정하였습니다(창13:10).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라보았고, 결정하였습니다(창13:14). 즉, 여호와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분명한 차이는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2025년 새해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점은 다름 아닌 ‘시선’과 ‘관점’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491억지 십자가를 지라 | 2024-12-01 |
억지로 무언가를 해야만 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에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져야 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당시 유월절을 맞아 북아프리카 지역에 구레네라는 마을에서 순례의 길을 떠나 예루살렘에 방문한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 마가복음의 처음 수신자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사람은 친숙한 이름일 것입니다. 어쩌면 로마교회 안의 성도 또는 영적 지도자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루포는 분명 바울 사도의 동역자였습니다. 심지어 루포의 어머니가 곧 나의 어머니라 할 정도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 십자가를 져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이 사실은 부정하고 저주스러운 일처럼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을 때, 그와 그의 가정에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때로는 억지로 무언가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원치 않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을 따르는 일, 즉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이미 주님께서 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각자의 십자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길 바랍니다. 억지 십자가를 지었던 시몬의 가정처럼. |
|
490감사를 심다 | 2024-11-24 |
일반적으로 ‘추수 감사’를 떠올릴 때, 얻어진 열매에 대한 감사, 즉 결과물에 대한 감사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과정에 대한 감사’, 더 나아가 ‘시작에 대한 감사’입니다. 올 한 해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가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열매가 없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감사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결과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정에 대한 감사’ 이자, ‘시작에 대한 감사’입니다. 성경에는 결과가 아닌 ‘과정 안에서 감사’를 깨달은 대표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결과와 열매에 대해서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의 태도가 180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현재 그에게는 어떠한 열매와 결과도 없었습니다. 분명 이로 인해 좌절과 비통함에 빠져 있어야 하지만, 계속되는 18절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이 그리했던 것처럼 삶의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기 원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자는 또 다른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눈앞에 열매가 없더라도, 감사를 심을 수 있습니다. ‘감사는 심는 것이다.’ 성경은 이 진리를 통해 분명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 126:6) |
|
489나는 참된교회입니다 | 2024-11-17 |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해로 인해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유대와 사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분명 이러한 상황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위기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흩어지고 사도들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해체되고 산산조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을 위한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4절) 각지에 흩어진 성도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했던 것처럼 말씀을 나누고, 이웃을 섬겼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머무는 곳에도 새롭게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는 하나의 교회로 그쳤지만, 흩어지게 되었을 때는 수많은 교회가 지역마다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교회 성도 한 사람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주일마다 함께 모이는 예배와 모임도 교회이지만, 흩어져서 돌아가게 된 삶의 자리 또한 교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참된교회’이기 때문입니다. |
|
488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 2024-11-10 |
‘이름’에는 그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정체성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이름은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화하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에서 ‘열국의 아버지’로 존재의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가 가진 ‘참된’이란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교회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참’이란 우리말은 ‘진리’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진리’라는 이 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여기에서 진리(The Truth)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난 3년간 예수님의 제자로서 곁에서 주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과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 되시는 참 진리(The Truth)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참된(The Truth)교회는 이 진리(The Truth) 위에 굳건히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터전 위에 세 가지 비전을 세워가야 합니다. 먼저는 오직 진리 되신 ‘예수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선포되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또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예배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참된’이란 이름을 가진 우리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와 같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
|
487말씀 중심의 공동체 | 2024-11-03 |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그 시점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앞서 23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 지냄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결론 맺을 것 같았던 이야기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라는 구절로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새벽에 어떠한 일이 있었나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천사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근심’(4절)과 ‘슬픔’(17절), 그리고 ‘두려움’(37절)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3일 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무덤에 다녀왔던 여인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발걸음은 엠마오로 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길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로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어져 있는’ 그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닫혀 있는 눈과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서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자 비전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
|
486예배 중심의 공동체 | 2024-10-27 |
요한복음 4장에서는 한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가리켜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 여인’이라 부르거나, 혹 이곳 성읍의 이름인 ‘수가성’이란 지명으로 ‘수가성 여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는 그 성안 우물가 곁에서 만난 여인이기에 ‘우물가의 여인’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길을 지나다 만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이면서도 고의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여인의 인생은 완전히 탈바꿈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는 반드시 변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처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한 남자’(9절)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화 가운데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여인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 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향해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에게는 영적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성전 예배에 대한 편견과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여인과 당시 사람들에게 이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24절). 이것은 진리의 영이 되신 성령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하여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진리와 진심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여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예배자로 서게 해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인에게는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가 수반되게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28절)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인의 전도로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고, 이 여인처럼 그들의 삶도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새로운 변화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예배의 자리로. |
|
485예수 중심의 공동체 | 2024-10-13 |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히브리어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연못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 먼저 뛰어든 사람은 어떠한 병이라도 고침을 받게 되는 기적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 병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한 병에 걸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연못에 뛰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첫 마디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였습니다. 주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렇습니다. 내가 낫기를 원합니다’ 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갔습니다’라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말투였습니다. 사실상 베데스다는 이와 같은 불만과 분노로 쌓인 병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습니다. ‘자비의 집’이란 이름과는 동떨어진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이 연못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못에 먼저 뛰어 들어간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병 고침을 받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고침을 받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의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했던 불만 섞인 말투와 태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고쳐준 것은 베데스다 연못이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병자가 연못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병자가 고침을 받은 까닭은 그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베데스다, 즉 자비와 은혜의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단지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장이 될 뿐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곧 교회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교회 어느 장소 어느 때든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참된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길 소망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키가 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