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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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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다시 로뎀으로 2025-06-29
‘번아웃 증후군’은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괴롭히는 가장 큰 적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장기적인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으로 소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증상 정도로 생각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탈진’(번아웃)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열왕기상 19장에서는 선지자 엘리야가 ‘영적 탈진’에 이르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8장에서는 갈멜산에서 850대 1의 영적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또한 3년간 극심한 가뭄에서 기도를 통해 큰 비가 내리는 기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그의 자리는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푸념 섞인 말로 하나님께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잠들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책망하거나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어루만지며’ 위로하시며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는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행20:24) 끊임없이 정진할 것을 말씀하지만, 반면 쉼과 안식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로뎀’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십니다. 심지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도피성’을 마련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뎀은 ‘피난처’였습니다. 그리고 위로의 장소였으며, 다시 사명을 회복한 곳이었습니다. 이후에 엘리야는 다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다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공동체의 표어입니다. 우리 교회가 ‘광야 한 가운데 있는 로뎀’이 되길 원합니다. 이러한 영적 안식과 평안, 그리고 자유가 있는 로뎀이 되길 소망합니다.
520다시 부르심으로 2025-06-22
오스기니스는 그의 책 「소명」에서 ‘소명’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 그분을 섬기는데 투자된다는 진리다’. 쉽게 말해 ‘부르심’이란 나의 조건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점입니다. ‘왜 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부르셨을까’. 그래서 이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 인격을 드려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여기에서 소명을 가리켜 다른 표현으로는 ‘다시 부르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모세를 떨기나무 가운데 부르신 사건(출3장), 또한 어린 사무엘을 실로에서 부르실 때에도(삼상3장), 공통적으로 인격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셨을 때 먼저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리고 ‘사무엘아, 사무엘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것은 정확히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다시 부르심’과 더불어 수반되는 한 가지는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사무엘에게는 선지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다시 부르심’의 사건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를 다시 부르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다시 디베랴 호수의 어부 생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습니다. ‘빈 그물’은 그의 상실감과 공허함을 잘 대변해 줍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한 첫 마디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였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인격적인 부르심, 즉 ‘다시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이 시간 주님이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상을 좇아 달려가는 성도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519다시 오순절로 2025-06-15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태동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신도는 오순절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함께 모인 자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2:4) 사도행전은 이러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처음 데오빌로에게 이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데오빌로는 성령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성령님의 존재는 신선하고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는 예수님의 지상명령(행1:8)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그는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 사건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 다음에 따라오게 될 ‘권능’ 은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힘든 일인데, 무려 삼천명이 한 자리에서 변화되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이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파생되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놀라운 폭발력을 가진 능력입니다. 성령의 다이너마이트가 그 자리에 선포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변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성령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 그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입니다. 날마다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길 바랍니다.
518다시 미스바로 2025-06-08
성경에서는 여러 특정한 장소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갖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보리 언덕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언급하면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연상됩니다. 이와 같이 장소가 갖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창세기 31장에 나오는 ‘미스바’ 역시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원래의 뜻은 ‘망대, 감시대’(watchtower)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을 살피고, 감찰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야곱이 라반과 언약을 맺은 장소였습니다. 상호 간의 평화조약을 이곳에서 맺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스바는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리라’(창31:49)는 의미를 담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야곱에게는 또 하나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그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가는 길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사자, 즉 군대가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것을 가리켜 ‘마하나임’ 이라 부릅니다. 마하나임은 두 진영의 군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의 앞과 뒤에서 두 진영의 군대로 살피시고 있습니다.
결국 야곱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인생 전체를 살피시는 ‘미스바의 하나님’ 이셨습니다. 동시에 앞에서 오는 위기뿐만 아니라 뒤에서 덮쳐오는 예상치 못한 위협에서 건지시는 ‘마하나임의 하나님’ 이 되십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시대는 이러한 진퇴양난의 영적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영적 타락과 밖으로는 블레셋의 위협으로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을 때 사무엘은 외쳤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삼상7:5)
‘미스바 운동’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대각성 부흥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며 부르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 미스바로’ 올라갑시다!
517다시 이야기로 2025-06-01
성경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로부터 예수님 이야기까지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삶을 변화시키게 만듭니다. 단지 한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공동체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공동체를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40여 년에 걸친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성경은 우리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1:18)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르치고(teaching), 전파하고(preaching), 고치셨습니다(healing)’
마태복음 5장부터는 이러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적고 있으며, 이어서 8장부터 9장까지는 병 고침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3대 사역에 대한 이야기들 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리켜 ‘복음’ 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복음 사역의 대전제가 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것’(마9:36, 막 6:34)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동정하셨습니다’(히4:15).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까닭은 우리와 ‘똑같이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셨고, 고난당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516다시 벧엘로 2025-05-25
‘벧엘’ 은 야곱에게 있어 영적인 본향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을 가졌고,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에게서 야곱을 축복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벧엘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야곱이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십분의 일을 드리겠나이다’(창28:20-22).

하지만 지금 야곱은 벧엘이 아닌 세겜 땅 숙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야곱은 제단을 쌓았고, ‘엘엘로헤이스라엘’ 이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여기’가 아닌 ‘거기’, 즉 벧엘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게 되었을 때, 큰 재앙이 찾아오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딸 디나가 세겜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복수와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될 일촉즉발의 위기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35:1)
하나님의 뜻은 ‘여기’ 가 아닌 ‘거기’ 였습니다. ‘세겜’이 아닌 ‘벧엘’ 의 하나님 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른 길로 향하였다’ 정도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였다’(욘1:3) 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서 절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호와의 얼굴’ 앞입니다. ‘거기’가 ‘벧엘’ 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 ‘벧엘’은 어디 인가요?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적 본향 입니다.
515다시 광야로 2025-05-18
‘광야’ 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요한 장소입니다. 구약의 출애굽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광야는 주목해야 할 장소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도 광야라 할 수 있습니다. 비단 광야는 삶의 공간뿐만 아니라 영적인 신앙의 장소입니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 마태복음 4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애의 시작을 앞두고 광야에서 시험 받으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
이 구절에서는 대립되는 두 존재가 등장합니다. ‘성령’과 ‘마귀’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성령’ 과 ‘마귀’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도 성령과 마귀,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항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하며 유혹하려 합니다. 이러한 영적 광야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광야에서 시험당하셨습니다. 결국 광야는 우리가 피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한번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광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시험 앞에 대처해야 할 신앙인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대표적인 두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다시 홍해 길로 가야 했던 출애굽 이스라엘입니다(민21장). 오랜 방황 끝에 가나안으로 직행하는 길이 막히고 다시 광야로 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쏟아 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21:5) 는 말로 그들은 ‘만나’(신8:3), 즉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불뱀의 재앙을 받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게 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신8:3)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천사들이 수종 드는 것으로 본문은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광야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말씀으로 살아가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514다시 빛으로 2025-05-11
누가복음 9장에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담겨 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는 과거 구약을 대표하는 두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현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두 선지자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즉 가까운 미래에 있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변화산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장차’ 있을 십자가 사건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 역사에 모든 초점이 맞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시선은 ‘현재’에 머물러 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33절)

변화산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변모하게 되신 것입니다. 용모가 변화되고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곧 빛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의 빛’ 이라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온 우주가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차 있을 때, 시작을 알리는 한마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창1:3). 그리고 요한복음이 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곧 말씀이자, 빛이 되십니다.

이와 같이 빛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또한 빛은 우리를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됩니다(시119:105). 그리고 빛은 어둠의 불의를 밝히는 ‘진리’가 되어 줍니다(요8:32). 그러므로 또 다른 시작을 향해 가는 우리 공동체는 다시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빛 되신 주님과 동행하는 참된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513다시 복음으로 2025-05-04
신약성경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보를 읽으면서,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자연스럽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복음서를 시작하는 이 부분이 갖는 중요한 상징성이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이 내용을 기록한 중요한 목적과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복음의 중요한 특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특징은 ‘복음은 연속성을 갖는다’ 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보가 구약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담의 계보는 ‘죽음’ 으로 끝을 맺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계보는 ‘죽음’ 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고, ‘낳고’ 또 ‘낳고’ 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의 계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사망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닌, 영생으로 연속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복음의 확장성’입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회 통념상 문제가 있는 다섯 여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제한받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완전성을 갖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참된교회는 은혜 가운데 지난 55년을 지나왔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는 이후로 50년 또한 동일한 은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은혜의 반세기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우리 공동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다시 복음 앞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512부활 후에 2025-04-27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과 행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행전의 대전제는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전제가 거짓이라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증인들의 증언 또한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과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폭력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신념을, 즉 믿음을 지켜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증인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며 말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필 십자가에 못 박힌 중죄인을 믿느냐’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세상의 시선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주이고, 실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1)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증인들은 가장 미련해 보이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뜻인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을 삼기 위해’(행1:8) 먼저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주님의 명령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먼저 부르심에 순종하게 될 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께서 불어 넣어 주십니다. 오순절 그날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