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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1고난받는 종의 노래 | 2025-04-20 |
| 이사야 53장은 대표적인 메시아 예언장입니다. 비단 이 본문뿐만 아니라 이사야에는 메시아 예언에 관한 여러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53장은 메시아에 대해서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찔리고 상함을 받는 고난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실 것으로 이미 700여 년 전부터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들어오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태어나면서부터,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보내셨고, 이후에 3년간의 공생애를 ‘참 사람’이 되어 보내셨던 이야기가 사복음서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마가복음은 이사야에서 예언한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이러한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 즉 ‘고난’에 주목하였던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연대는 A.D 50-7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가는 로마에서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시기 로마는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한 때이기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신앙인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위로’의 메시지, 즉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핵심은 ‘예수님께서도 고난 당하셨다’ 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고난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 지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영광스런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난 뒤에는 영원한 승리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에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감당할 만큼의 고난만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이 우리를 괴롭힐 때, 한 번 더 떠올리길 바랍니다. ‘주님도 고난 당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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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십자가에 못 박다 | 2025-04-13 |
| 우리는 늘 가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가장 멀리 있는 십자가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5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결국 ‘우리 때문에’ 짊어지신 십자가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또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켜내며, 마침내 승리하게 되었다는 사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결론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는 12장을 시작하며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결국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다’의 원어상의 의미는 ‘(어떤 것에) 고정시키다’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갔을 때 그 또한 물 위를 걷게 되었지만, 잠시 눈을 돌려 풍랑을 바라보는 순간 깊은 바다로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고정되어야 합니다. 한눈파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예수님만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순간도 한 눈 팔지 않고 예수님께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을 고정하셨습니다. 양손과 발에 못을 박히면서까지 십자가에 모든 것을 고정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너희도 못 박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예수님을 바라만 보기를, 그 분께 시선을 고정하도록 요청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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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9나를 누구라 하느냐 | 2025-04-06 |
| 초대교회 당시 많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핍박 아래서 성도들만의 표식이 필요했는데, 물고기 문양의 기호였습니다. 헬라어 ‘익투스’(ΙΧΘΥΣ)는 물고기를 뜻합니다. 익투스는 다음의 다섯 가지의 단어의 앞 글자를 따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①Ιησουζ(예수스=예수) ②Χριστοζ(크리스토스=그리스도) ③Θεοζ(테오스=하나님) ④Υιοζ(휘오스=아들) ⑤Σωτηρ(소테르=구세주) 이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 했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고백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고, 다양한 자리에서 봉사하며 교회를 섬겨왔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히 많은 시간 성경 공부를 하며, 여러 권의 신앙 서적을 읽음으로써 예수님에 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시몬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고백은 ‘지식적인 앎’이 아닌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얻게 된 ‘믿음’ 이었습니다. 믿음은 곧 ‘생활’입니다. 생활 가운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마16:17)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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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8이 마음을 품으라 | 2025-03-30 |
|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이자 목회자였던 찰스 스펄전은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 이었습니다. “나는 설교할 때 곧장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며,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식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예수님을 떠올리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어떠한 마음의 울림이 없습니다. 메마른 심령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을 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2:5) 식어 버린 마음을 대신하여 새로운 마음, 곧 ‘이 마음’을 품기를, 갖기를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당시 바울이 처해 있던 환경은 ‘옥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 또한 빌립보서의 주제가 되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비록 감옥이라 할지라도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는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 행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갖게 되는 참된 기쁨이자 행복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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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교회와 가정을 잇다 | 2025-03-23 |
| “애들은 소유가 아니에요. 많이 사랑해 줘야죠. 크리스천 부모들이라면, 청지기로서 아이들이 스무 살 넘으면 하나님 자녀로 잘 파송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죠. 그러려면 '이 나이에 무슨 꿈이야' 할 게 아니라 부모들도 꿈을 꾸셔야 해요. 인간이 인간을 가르쳐서 변화되는 일은 많지 않아요. 우리가 품을 수 있을 때 품고, 같이 품고, 서로 품고 연대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죠. 아이가 꿈꾸게 하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게 아니라, 같이 꿈꾸면서 가시면 좋겠어요. 이렇게 하면 '보상심리' 때문에 힘들지 않으실 거예요. 이만큼 투자했으니 이만큼 뽑아내야 하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같이 한 살이 되는 거라고 해요. 같이 태어나서 같이 꿈꾸고, 같이 어린아이가 되기도 하고, 도움을 줄 때는 함께하고 연대하는 가정이 되면 좋겠어요." (오선화 작가 인터뷰 중에서, 크리스천투데이) 일찍이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이자 멘토였습니다. 한 사람의 신실한 목회자, 디모데가 세워지기까지 이러한 영적 멘토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의 신앙이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까지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온 신앙의 유산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바울과 같은 훌륭한 영적 멘토와의 만남이 더해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위대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가정을 잇는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은 비단 교회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정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와 가정이 하나 되어 함께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사명, 즉 ”요나단의 비전으로 다윗을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가정, 그리고 자녀를 잇는 통합적인 신앙 교육을 통해 오늘날의 디모데, 그리고 다윗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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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6그리스도인 바나바 | 2025-03-16 |
|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로 시작되는 시 133편은 하나님의 축복과 영적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이’ 축복이 개인을 통해 공동체 전역으로 흘러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나바’라는 인물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역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이름보다는 별명, 즉 ‘바나바’로 불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나바의 본래 의미와 같이 그는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위로의 사람, 축복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성경 본문은 사도행전 11장 1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첫 번째로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나바의 첫 번째 이미지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신앙을 소개하기 앞서서 인격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성품과 인격이 어떠했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장)를 통해 말해주고자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진정한 친구인가’, 더 나아가 ‘과연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이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신분이나 조건이 아닌, 하찮은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착한 성품과 행동’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주는’ 바보처럼 보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미련해 보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자 진리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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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5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 2025-03-09 |
| 선지자 하박국은 부흥에 대한 갈망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합3:2) 이 구절에서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수년 내’ 라는 숫자일 것입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부흥을 맛볼 수 있다면....’ 누구나 꿈꾸고 바라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바랐던 참된 부흥은 ‘숫자’(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빨리’ 부흥되기를 바랐다기보다는 ‘진정한’ 부흥을 열망하였던 것입니다. 앞서 그는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2:3)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빠른’ 부흥이 아닌, ‘바른’ 부흥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부흥하다’는 히브리어로 ‘하야’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살다, 살아내다’ 입니다. 부흥은 근본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 즉 필연적인 생존의 문제입니다. 마치 우리의 호흡이 멈추게 되면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부흥은 곧 영적인 호흡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양적인) 확장과 (숫자상의) 성장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겔 37장에서는 부흥의 시작이 ‘호흡’(생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러 넣으시게 되었을 때, 살아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기’가 곧 ‘호흡’(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불게 되었을 때, 아무런 소망 없는 마른 뼈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살아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하야’입니다. 곧 ‘부흥하다’입니다. 결국 참 부흥의 의미를 깨닫게 된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3:17). 부흥은 숫자(양)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이 깨달은 부흥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심령을 채우게 될 때, 비로소 영혼의 부흥이 있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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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4'안정'과 ‘안주’ | 2025-03-02 |
| 구약의 역사는 ‘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의 중심에는 ‘땅’이 있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 비전을 품고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이스라엘 역사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그 땅에서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고, 이방의 신들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도 그들을 떠났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의 신앙이 안주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시도 앞에서 안정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안정을 위한 노력이 자칫 안주하도록 만듭니다. 이스라엘 지역에는 ‘사해’ 라는 바다가 있습니다. 사실 바다라기 보다는 내륙 가운데 있는 큰 호수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호수와는 다르게 바닷물처럼 짠맛을 내기에 오래전부터 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염분의 농도가 바닷물의 7배에 달할 정도로 짙습니다. 그래서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몸이 뜨게 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휴양지이기도 합니다. 비록 바닷물처럼 짠맛을 낸다고 하더라도, 사해는 고여있는 담수호입니다.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 즉 ‘사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새로운 시작을 하는 즈음에 있습니다. 변화와 도전 앞에서 안주하게 될 때, 영적인 ‘사해’처럼 될 것입니다. 결코 ‘축복’은 고인 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흐르는 강물이 되어 교회와 가정에까지 흘러넘쳐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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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3온전하여지다 | 2025-02-23 |
|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15세기 수도사로 평생을 경건에 힘썼던 사람입니다. 경건한 삶을 위해 그가 강조한 것은 ‘채움’이 ‘비움’이었습니다. 또한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더욱 유익함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5장 21절 이하에는 두 여인에 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에게 존경과 신망을 받았던 위치에 있던 사람이 회당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회당장의 사랑스런 딸이 죽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또 한 여인은 정반대의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던 사람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입니다. 당시 혈루증은 단순한 육체적인 질병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여인을 멀리하였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부 생활도 할 수 없었으며, 가족들조차 외면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반대의 환경에서 살았던 두 여인에게서 공통점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저자 마가가 주목하였던 유일한 공통점은 ‘열둘(12)’이라는 숫자였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과 죽음의 위기에 처한 ‘열두 살’ 소녀입니다. 숫자 12는 유대인의 관념상 가장 이상적인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열두 해 동안 병을 낫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열두 살 소녀는 부모의 완전한 보호 아래 양육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병은 더 중하여졌고, 소녀는 죽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실패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회당장은 딸에게 ‘주님의 손을 대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손끝(옷자락)이 닿는 것 만으로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단순한 믿음의 행동을 통해 그들은 온전하여졌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 그저 딸의 몸에 손만 대어달라고 간구하는 것, 하지만 이러한 단순함이 기적을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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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2고난이 주는 선물 | 2025-02-16 |
| 『고통이라는 선물』(폴브랜드, 필립얀시 공저)은 폴브랜드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는 저명한 의사이자, 의료선교사였습니다. 특히 평생을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나병인을 위해 그가 주고 싶었던 최고의 선물은 ‘고통’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손가락 마디가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통 혹은 고난은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에게도 염려와 근심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후반부에 보면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태장에 맞기도 하며,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았습니다.’ 이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러한 고통 앞에서 당연히 두려움과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근심은 이런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근심은 ‘교회를 위한 염려’(고후11:28)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교회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압박감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는 진정 주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핍박으로 인해 교회가 고난당하는 상황을 보면서 염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히4:15).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했습니다. 아파본 사람이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이 누군가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로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도 유익합니다. 고난은 선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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