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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구별된 축복 | 2025-01-19 |
출애굽기에서는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네 번째 재앙은 열 가지 재앙 사건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됩니다. 출애굽기 8장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백성을 사이를 구별하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구별하다’ 의 본래 의미는 ‘(몸 값을 지불하고) 석방하다’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구속하다’입니다. 네 번째 재앙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를 구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앞서 세 번째 재앙까지는 바로의 술사들도 그 이적을 흉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재앙부터는 그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네 번째 재앙은 ‘구별됨’ 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같이 ‘구별’ 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네 번째 재앙을 시작으로 이후의 재앙들은 이스라엘이 머물었던 고센 땅을 피해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출8:2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하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여호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도, 그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던 까닭도, 그리고 재앙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이유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였습니다.(출7:5, 8:22) 진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특별히 구속 역사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이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다른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을 배제한 채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축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하나님을 구별되게 섬기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어 ‘카도쉬’ 는 ‘거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구별하다’ 는 뜻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너희도 거룩하라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고 구별되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닌 주님의 날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날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도 구별된 은혜와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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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복의 기원 | 2025-01-12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 간구는 목회자 요한의 성도를 향한 태도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목회자라면 당연히 성도가 잘 되기를 바라며 축복을 기원합니다. 단순히 이것은 목회자만이 갖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 받기를 누구보다 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축복에 관해서 여러 본문과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시편을 시작하는 그 첫 번째 단어도, 또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본격적인 가르침을 기록한 ‘산상수훈’의 역시 그 시작은 ‘복’ 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복을 간구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복’ 이자 ‘기복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축복’ 과 ‘기복’을 구별해야 합니다. 기복신앙이라 함은 신앙생활에서 물질적, 육체적 복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신앙 태도나 종교적 관행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할 축복은 무엇인가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땅을 약속하셨고,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높이리라는 명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 속에 가려져 있는 진정한 복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는 말씀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복의 근원’이자 ‘복의 기원’이 되리라는 언약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시작이십니다. 축복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도 이러한 특별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이 복의 기원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의 자녀’ 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본질은 물질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자 출발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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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안식을 위한 도전 | 2025-01-05 |
‘인류의 역사는 땅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땅’이란 단어로 세상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창1:2) 또한 인류도 땅(흙)으로부터 시작하여 땅(흙)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따라서 땅은 사람에게 안식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안식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땅을 갖고자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 또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땅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바라던 땅을 갖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게는 안정과 안식이 찾아왔을까요.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삿2:12) ‘여호와를 버렸다’. 이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새로운 땅에 ‘안주’하게 되었을 때, 찾아온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 원하시는 뜻은 ‘안정’을 뛰어넘는 ‘안식’입니다.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7일째 안식하셨던 것은 혼자만의 안식이 아닌 모든 창조물이 함께 안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워싱턴 D.C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관에 큰 글씨로 새긴 문구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절대로 ‘공짜’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누리는 신앙의 안정과 안식은 이전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입니다. 따라서 안식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2025년에 주실 안식과 평안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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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나는 일어서리라 | 2024-12-29 |
사도행전 3장에서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걸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반면에 ‘날마다’ 성전에 올라왔던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일 세 번의 정해진 시간에 예배와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유대인들과 미문 앞 걸인은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날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걸인에게 준 것은 몇 푼의 동전이 아니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그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도 이 걸인을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도 상황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즉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눈에 비치는 걸인은 단순히 행색이 초라하고 불쌍한 장애인 정도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그 영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은과 금’도 아니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걷게 되었을 때, 맨 먼저 그가 찾았던 곳은 ‘성전 안’이었습니다. 평생을 성전 밖에만 있던 그가 비로소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주일 마다 우리는 교회로 모입니다. ‘무엇을 얻을까?’ 하는 바람이 아닌 ‘예배하기 위해’ 나옵니다. 2025년도 예배를 통해 여러분과 가정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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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만나의 교훈 | 2024-12-22 |
출애굽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여 년 동안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광야 생활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기보다는 버려야 하는 ‘내려놓음’이 필요했습니다. 즉 영적인 미니멀리즘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광야의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독특한 생활 방식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만나’였습니다. 매일 아침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고, 이것이 일용할 양식이 되었습니다. 5일 동안은 한 오멜씩을, 그리고 6일 째는 두 오멜을 거두게 하셨는데, 다음 날이 ‘여호와의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가’(출16:4)였습니다. 따라서 광야는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매일의 만나를 통해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훈련하며 시험받는 곳이 ‘광야’입니다. 비단 광야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장소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대에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살아내기 위해 만나를 통해 주시는 유익한 교훈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출16:12)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요6:35)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곧 만나가 되십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공급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는 분이 하나님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영원한 생명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거친 광야에서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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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2024-12-15 |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요2:1-12)에서 베푸신 이적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번째 표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일주일간 진행이 됩니다. 그 기간 동안 흥겨운 잔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음식과 포도주는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 그리고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100리터가 넘는 여섯 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할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이나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하인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디아코노스’입니다. 그 의미는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이 잔치를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거나, 적어도 잔치를 주선하는 측에서 사례를 주고 고용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첫 번째 이적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11절) 무엇보다도 연회장을 비롯한 신랑과 신부도 알지 못했던 ‘물이 포도주로 변한’ 예수님의 이적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요20:30-31)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물 떠온 하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9절)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025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해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간증으로 기억되는 새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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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여호와의 눈으로 바라보라 | 2024-12-08 |
인생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있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그때 ‘A가 아니라 B를 선택하였더라면’ 이라 생각하면서 후회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정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가족의 문제, 공동체를 위한 결정이라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람과 롯의 선택과 결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그들은 양자택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먼저 조카 롯에게 제안하게 됩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편을 선택하면 나는 왼편으로 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제안에 따라 롯이 먼저 결정했습니다. 그가 바라보았던 장소는 풍부한 물과 초목이 우거진 요단 지역이었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았고 애굽과 같은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은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선택의 결과는 너무도 가혹하였습니다. 그가 선택한 지역은 소돔이었습니다. 얼마 후 롯은 부족 간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모든 재산과 가족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브람의 도움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결국에는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언약이 그를 통해 성취되었고, 그와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과 극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롯은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결정하였습니다(창13:10).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라보았고, 결정하였습니다(창13:14). 즉, 여호와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분명한 차이는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2025년 새해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점은 다름 아닌 ‘시선’과 ‘관점’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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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억지 십자가를 지라 | 2024-12-01 |
억지로 무언가를 해야만 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에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져야 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당시 유월절을 맞아 북아프리카 지역에 구레네라는 마을에서 순례의 길을 떠나 예루살렘에 방문한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 마가복음의 처음 수신자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사람은 친숙한 이름일 것입니다. 어쩌면 로마교회 안의 성도 또는 영적 지도자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루포는 분명 바울 사도의 동역자였습니다. 심지어 루포의 어머니가 곧 나의 어머니라 할 정도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 십자가를 져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이 사실은 부정하고 저주스러운 일처럼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을 때, 그와 그의 가정에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때로는 억지로 무언가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원치 않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을 따르는 일, 즉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이미 주님께서 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각자의 십자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길 바랍니다. 억지 십자가를 지었던 시몬의 가정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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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감사를 심다 | 2024-11-24 |
일반적으로 ‘추수 감사’를 떠올릴 때, 얻어진 열매에 대한 감사, 즉 결과물에 대한 감사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과정에 대한 감사’, 더 나아가 ‘시작에 대한 감사’입니다. 올 한 해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가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열매가 없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감사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결과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정에 대한 감사’ 이자, ‘시작에 대한 감사’입니다. 성경에는 결과가 아닌 ‘과정 안에서 감사’를 깨달은 대표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결과와 열매에 대해서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의 태도가 180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현재 그에게는 어떠한 열매와 결과도 없었습니다. 분명 이로 인해 좌절과 비통함에 빠져 있어야 하지만, 계속되는 18절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이 그리했던 것처럼 삶의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기 원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자는 또 다른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눈앞에 열매가 없더라도, 감사를 심을 수 있습니다. ‘감사는 심는 것이다.’ 성경은 이 진리를 통해 분명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 12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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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나는 참된교회입니다 | 2024-11-17 |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해로 인해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유대와 사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분명 이러한 상황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위기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흩어지고 사도들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해체되고 산산조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을 위한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4절) 각지에 흩어진 성도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했던 것처럼 말씀을 나누고, 이웃을 섬겼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머무는 곳에도 새롭게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는 하나의 교회로 그쳤지만, 흩어지게 되었을 때는 수많은 교회가 지역마다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교회 성도 한 사람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주일마다 함께 모이는 예배와 모임도 교회이지만, 흩어져서 돌아가게 된 삶의 자리 또한 교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참된교회’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