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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안정'과 ‘안주’ | 2025-03-02 |
구약의 역사는 ‘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의 중심에는 ‘땅’이 있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 비전을 품고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이스라엘 역사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그 땅에서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고, 이방의 신들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도 그들을 떠났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의 신앙이 안주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시도 앞에서 안정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안정을 위한 노력이 자칫 안주하도록 만듭니다. 이스라엘 지역에는 ‘사해’ 라는 바다가 있습니다. 사실 바다라기 보다는 내륙 가운데 있는 큰 호수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호수와는 다르게 바닷물처럼 짠맛을 내기에 오래전부터 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염분의 농도가 바닷물의 7배에 달할 정도로 짙습니다. 그래서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몸이 뜨게 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휴양지이기도 합니다. 비록 바닷물처럼 짠맛을 낸다고 하더라도, 사해는 고여있는 담수호입니다.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 즉 ‘사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새로운 시작을 하는 즈음에 있습니다. 변화와 도전 앞에서 안주하게 될 때, 영적인 ‘사해’처럼 될 것입니다. 결코 ‘축복’은 고인 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흐르는 강물이 되어 교회와 가정에까지 흘러넘쳐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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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온전하여지다 | 2025-02-23 |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15세기 수도사로 평생을 경건에 힘썼던 사람입니다. 경건한 삶을 위해 그가 강조한 것은 ‘채움’이 ‘비움’이었습니다. 또한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더욱 유익함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5장 21절 이하에는 두 여인에 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에게 존경과 신망을 받았던 위치에 있던 사람이 회당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회당장의 사랑스런 딸이 죽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또 한 여인은 정반대의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던 사람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입니다. 당시 혈루증은 단순한 육체적인 질병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여인을 멀리하였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부 생활도 할 수 없었으며, 가족들조차 외면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반대의 환경에서 살았던 두 여인에게서 공통점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저자 마가가 주목하였던 유일한 공통점은 ‘열둘(12)’이라는 숫자였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과 죽음의 위기에 처한 ‘열두 살’ 소녀입니다. 숫자 12는 유대인의 관념상 가장 이상적인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열두 해 동안 병을 낫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열두 살 소녀는 부모의 완전한 보호 아래 양육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병은 더 중하여졌고, 소녀는 죽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실패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회당장은 딸에게 ‘주님의 손을 대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손끝(옷자락)이 닿는 것 만으로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단순한 믿음의 행동을 통해 그들은 온전하여졌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 그저 딸의 몸에 손만 대어달라고 간구하는 것, 하지만 이러한 단순함이 기적을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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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고난이 주는 선물 | 2025-02-16 |
『고통이라는 선물』(폴브랜드, 필립얀시 공저)은 폴브랜드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는 저명한 의사이자, 의료선교사였습니다. 특히 평생을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나병인을 위해 그가 주고 싶었던 최고의 선물은 ‘고통’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손가락 마디가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통 혹은 고난은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에게도 염려와 근심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후반부에 보면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태장에 맞기도 하며,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았습니다.’ 이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러한 고통 앞에서 당연히 두려움과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근심은 이런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근심은 ‘교회를 위한 염려’(고후11:28)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교회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압박감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는 진정 주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핍박으로 인해 교회가 고난당하는 상황을 보면서 염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히4:15).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했습니다. 아파본 사람이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이 누군가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로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도 유익합니다. 고난은 선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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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주의 날개와 옷자락 | 2025-02-09 |
이삭 줍는 여인, 룻의 이야기는 단순한 한 인간의 성공 스토리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이 없는 ‘청상과부’ 이자, 이방 여인이 유대 땅으로 건너와서 유력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이 역전하게 된 이야기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룻기는 한 유대인 가정이 모압으로 이민 오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극심한 가뭄과 가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방 땅으로 오게 되었지만, 불과 십 년 만에 이민생활은 실패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이후에 두 아들도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았을 뿐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모압 사람이었던 두 며느리에게 가족에게로 돌아가 새출발 하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친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룻의 입장에서는 굳이 시어머니를 따라 타국으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유대는 낯선 타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압사람을 대하는 유대인의 차별적인 시선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부담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오미와 함께 할 것을 다짐하며 결단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 룻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나오미를 따라 가는 것은 그녀의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녀는 모압의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유대를 향해 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룻은 믿음에 따라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유대에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신 것도, 그를 통해 나오미와 자신의 가문에 ‘기업 무를 자’가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마침내 룻과 보아스 사이에 오벳이 태어났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주의 날개와 옷자락’(룻2:12,3:9)으로 룻과 나오미를 보호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축복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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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인생을 담다 | 2025-02-02 |
성경을 살펴보면 음식 또는 요리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야곱이 요리한 팥죽’이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둘은 쌍둥이였지만 전혀 다른 성격과 기질을 타고 났습니다. 에서는 외형적이고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고 집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몹시 허기지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팥죽을 요리하고 있던 야곱에게 한 그릇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고,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과 맞바꾸게 됩니다. 결국 팥죽 한 그릇으로 시작된 에서와 야곱의 축복에 관한 권리는 동생 야곱에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25:34)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비록 팥죽 한 그릇이라 할지라도 ‘인생요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야곱과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이 임하였던 것을 보게 될 때, 보잘것없는 작은 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인생을 담아 하나님께 드릴 때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열왕기상 17장에도 ‘인생요리’가 등장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요리를 하여 아들과 먹고 죽고자 하였을 때, 먼저 그것을 자신에게 만들어 달라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청에 순종하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요리라고 부르기에는 하찮은 떡 한 조각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요리를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 주었을 때, 떡 반죽 그릇에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채워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말씀에 따라 아합왕 앞에서, 그릿 시냇가로, 그리고 사르밧으로 갔을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셨고 예비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의 삶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인에게도 돌보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먼저’ 순종하면 ‘그 후에’ 책임져 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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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불쌍히 여기사 | 2025-01-26 |
오병이어 기사는 예수님의 가장 대표적인 이적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기사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병이어 기사에는 예수님께로 모여든 수많은 군중이 등장하는데, 그들을 가리켜 ‘큰 무리’ 라 지칭하고 있습니다(막6:34). ‘큰 무리’의 특징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행하셨던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당시의 ‘큰 무리’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기적’ 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단지 오병이어, 즉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수만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현상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그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무리’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육체의 양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심정은 “불쌍히 여기사” 였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그 뜻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나 동정, 슬픔’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심정으로 무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후에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으로 그들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은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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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구별된 축복 | 2025-01-19 |
출애굽기에서는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네 번째 재앙은 열 가지 재앙 사건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됩니다. 출애굽기 8장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백성을 사이를 구별하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구별하다’ 의 본래 의미는 ‘(몸 값을 지불하고) 석방하다’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구속하다’입니다. 네 번째 재앙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를 구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앞서 세 번째 재앙까지는 바로의 술사들도 그 이적을 흉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재앙부터는 그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네 번째 재앙은 ‘구별됨’ 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같이 ‘구별’ 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네 번째 재앙을 시작으로 이후의 재앙들은 이스라엘이 머물었던 고센 땅을 피해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출8:2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하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여호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도, 그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던 까닭도, 그리고 재앙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이유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였습니다.(출7:5, 8:22) 진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특별히 구속 역사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이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다른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을 배제한 채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축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하나님을 구별되게 섬기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어 ‘카도쉬’ 는 ‘거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구별하다’ 는 뜻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너희도 거룩하라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고 구별되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닌 주님의 날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날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도 구별된 은혜와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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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복의 기원 | 2025-01-12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 간구는 목회자 요한의 성도를 향한 태도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목회자라면 당연히 성도가 잘 되기를 바라며 축복을 기원합니다. 단순히 이것은 목회자만이 갖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 받기를 누구보다 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축복에 관해서 여러 본문과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시편을 시작하는 그 첫 번째 단어도, 또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본격적인 가르침을 기록한 ‘산상수훈’의 역시 그 시작은 ‘복’ 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복을 간구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복’ 이자 ‘기복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축복’ 과 ‘기복’을 구별해야 합니다. 기복신앙이라 함은 신앙생활에서 물질적, 육체적 복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신앙 태도나 종교적 관행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할 축복은 무엇인가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땅을 약속하셨고,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높이리라는 명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 속에 가려져 있는 진정한 복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는 말씀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복의 근원’이자 ‘복의 기원’이 되리라는 언약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시작이십니다. 축복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도 이러한 특별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이 복의 기원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의 자녀’ 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본질은 물질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자 출발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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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안식을 위한 도전 | 2025-01-05 |
‘인류의 역사는 땅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땅’이란 단어로 세상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창1:2) 또한 인류도 땅(흙)으로부터 시작하여 땅(흙)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따라서 땅은 사람에게 안식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안식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땅을 갖고자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 또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땅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바라던 땅을 갖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게는 안정과 안식이 찾아왔을까요.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삿2:12) ‘여호와를 버렸다’. 이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새로운 땅에 ‘안주’하게 되었을 때, 찾아온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 원하시는 뜻은 ‘안정’을 뛰어넘는 ‘안식’입니다.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7일째 안식하셨던 것은 혼자만의 안식이 아닌 모든 창조물이 함께 안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워싱턴 D.C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관에 큰 글씨로 새긴 문구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절대로 ‘공짜’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누리는 신앙의 안정과 안식은 이전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입니다. 따라서 안식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2025년에 주실 안식과 평안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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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나는 일어서리라 | 2024-12-29 |
사도행전 3장에서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걸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반면에 ‘날마다’ 성전에 올라왔던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일 세 번의 정해진 시간에 예배와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유대인들과 미문 앞 걸인은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날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걸인에게 준 것은 몇 푼의 동전이 아니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그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도 이 걸인을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도 상황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즉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눈에 비치는 걸인은 단순히 행색이 초라하고 불쌍한 장애인 정도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그 영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은과 금’도 아니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걷게 되었을 때, 맨 먼저 그가 찾았던 곳은 ‘성전 안’이었습니다. 평생을 성전 밖에만 있던 그가 비로소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주일 마다 우리는 교회로 모입니다. ‘무엇을 얻을까?’ 하는 바람이 아닌 ‘예배하기 위해’ 나옵니다. 2025년도 예배를 통해 여러분과 가정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