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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1감사하는 삶을 삽시다 | 2021-10-10 |
|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의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중증장애인 송명희씨의 시입니다. 최덕신집사가 이 시에 곡을 붙여 복음성가로 부르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 시가 되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1963년에 서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 의사의 실수로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지만, 중증장애를 신앙으로 극복하여 시집과 간증 수기를 출판했고 전국교회를 돌면서 1600회에 달하는 간증집회를 하여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었고 낙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말부터 무리한 사역 활동으로 목 디스크를 얻었고, 노화 현상까지 증가하여 모든 사역 활동과 집필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신이 마비되어 그를 아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송명희 시인를 장애인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휠체어에 탄 채 어눌한 말투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손과 발을 다 섞어가며 메시지를 전하던 송명희의 그 환한 모습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합니다. 언젠가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저는요 죽는다는 두려움보다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두려워요.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불안할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그리고 감사해요> 중증장애인으로, 가진 재물 없어도, 가진 지식 없어도, 지금은 병석에서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감사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상황을 비관하며 불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유에 대한 불만, 주변 상황에 대한 불평,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송명희 시인의 나가진 재물 없어도,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모든 것은 주께서 인도하시고 주관하심을 깨달아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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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0포기하지 않는 삶 | 2021-10-03 |
| 18세기 조선시대의 실학자로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 선생은(1762-1836) 학문과 재능이 뛰어났지만 정치적 당쟁에 휘말려 18년의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실학(實學)의 큰 뜻을 품었지만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장악했던 노론 벽파의 반대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고향인 경기도 양수리로 돌아와 집필 활동을 하시다 75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2살(1783)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어느 날 성균관 유생들이 모여 이발기발(理發氣發) 대하여 토론하는 과정 중 정조에게 발탁되어 정조의 측근으로 일을 합니다. 31살 때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하여 수원성을 건립할 때 정조는 정약용에게 중책을 맡깁니다. 이때 다산은 설계도를 만들었고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창안하여 기중기를 만들어 공사에 사용하여 수원성 건립을 잘 감당합니다. 33살에 경기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었으며 38살에 형조참의로 임명되어 그 직임을 성실히 잘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39살 되던 해 정조가 죽자 그를 시기하는 노론벽파 사람들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40세에 그는 귀양을 가게 됩니다. 중앙과 지방의 행정 경험을 많이 쌓았던 그는 장차 명재상이 되어 나라를 새롭게 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지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갑니다.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양성했고 책을 집필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18년간 긴 세월 유배지에서 보냈다면 뜻을 굽히고 절망을 하는데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뜻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또한 <황상>과 같은 제자를 양성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주변의 환경 때문에 자신의 큰 뜻을 펼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도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귀양지에서 포기하지 않고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다산 선생의 삶처럼 우리도 뜻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는 삶을 삽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12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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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9독서하는 습관 | 2021-09-26 |
| 저는 매일 아침 편지를 받습니다. 아침편지문화재단에서 보내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의 이메일입니다. <아침편지>는 여러 책에 나온 좋은 문장을 짧게 인용하여 편지를 보냅니다. 아침에 묵상하기 좋은 문장들입니다. 아침편지를 보내는 고도원 선생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책 읽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고은석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가난한 시골교회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언제나 손에 책이 들려 있는 독서광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들에게 책 읽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책 읽는 훈련으로 감동받은 문장에 줄을 치고, 독서카드를 작성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고도원은 중학교 2학년 때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토인비의 <역사연구>을 읽고 감동받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뷰한 글을 보니 그는 아버지 고은석 목사님으로부터 <책 읽는 것, 남을 위한 눈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연세대학 신학과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대학신문 <연세춘추>의 편집장을 지냈고, 졸업 후 <뿌리 깊은 나무> 잡지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대중 대통령 연설문 담당 비서관을 지냈습니다. 그가 대통령 연설문 담당 비서관이 되었다는 것은 글 쓰는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은 다독가이며 연설가이며 기억력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그런 대통령 밑에서 연설문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5년 동안 그를 지탱해준 것은 독서의 힘이었습니다. 그 후 2001년 8월 1일 “희망이란” 제목의 아침편지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매일 아침 360만 명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글을 써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책 중에 감동받은 문장을 남에게 전달하는 일 역시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는 자신이 읽은 책 중에 감동받은 문장을 남에게 알려 함께 감동받자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다니엘서 1:17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처럼 어린 시절 독서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2021년 가을, 자녀들에게 독서하는 습관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 속에 길이 있고 글을 읽을 때 꿈을 키울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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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8 묘비가 없는 칼빈 | 2021-09-19 |
| 종교 개혁자 칼빈(Jean Calvin 1509∼1564-프랑스 발음으로 칼뱅, 깔뱅으로 부른다)은 프랑스 느와용에서 1509년 태어났습니다.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느와용 지역교회의 주교 행정비서와 교회 법무 일을 했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성직록(聖職祿-성직자에게 주는 봉급)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어린시절 성직자가 되고자 파리로 유학을 가서 스콜라 신학 공부를 하였고 아버지의 권유로 부르주, 오를레앙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1531년 아버지가 죽자 그는 파리로 돌아와 고전과 인문학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1533년 칼빈은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 왕립대학 학장으로 취임할 때, 비판적 연설문을 써주므로 파리에서 쫓겨나 도망을 가게 됩니다. 이후 1535년 스위스 바젤에서 숨어서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게 됩니다. 그가 집필한 <기독교 강요>는 1559년 최종판까지 라틴어판, 프랑스어판 등으로 증보, 보완되어 출판되었습니다. 1536년 칼빈은 신학 연구를 계속하려고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하던 중 전쟁으로 가는 길이 어려워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서 가게 됩니다. 이때 제네바에서 개혁을 하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를 만나 제네바에 정착하여 종교개혁을 합니다. 제네바 시에 정착한 칼빈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당시 영국에서 교회개혁을 하려다 어려움을 겪고 제네바로 피신한 잔 낙스(John Knox, 1513-1572)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제네바 시에서 종교개혁을 한 칼빈의 삶은 너무나 위대한 개혁자의 삶이었습니다. 칼빈은 살아서 실행한 개혁주의 실천뿐 아니라 죽으면서 남긴 유언까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가 남긴 유언은 내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무덤을 알리는 <J.C>라고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마저 없었는데 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신앙을 추모하므로 약자로 <J.C>표시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고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러나 칼빈은 묘비에 그의 이름을 새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영광만을 추구했습니다. 우리도 칼빈의 삶을 본받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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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7핑계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 2021-09-12 |
| 대중 가요중 <핑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랫말을 보면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마 /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 니가 지금 나라면은 넌 웃을 수 있니 / 혼자 남는 법을 내게 가르쳐준다며 / 농담처럼 진담인 듯 건넨 그 한마디 / 안개꽃 한다발속에 숨겨진 편지엔 / 안녕이란 두 글자만 깊게 새겨있어 / 이렇게 쉽게 니가 날 떠날 줄은 몰랐어 /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 슬픈 사랑을 가르쳐준다며 ---”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면서 <혼자 있는 것을 가르쳐 준다며, 슬픈 사랑을 가르쳐준다며> 핑계를 대는 모습을 보면서 네게 그런 핑계 대지마 입장 바꿔 보면 너는 헤어지면서 웃을 수 있느냐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상대방에게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핑계>라는 단어의 뜻은 1.내키지 않는 사태를 피하거나 사실을 감추려고 방패막이가 되는 다른 일을 내세움. 2.잘못한 일에 대하여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구차한 변명을 말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보면 핑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모임에 조금 늦으면 “차가 많이 막혀서” “출발하는데 급한 전화가 와서”라는 가벼운 핑계부터,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기 싫어 배가 아프다고 하는 등 누구나 한 번쯤 했을 핑계들이 있습니다. 또한 세계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고 간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들이 재판과정에서 한 뻔뻔스러운 핑계들도 있습니다. 핑계는 대부분 자신을 변명하는 수단으로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핑계를 댑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며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라 합니다. 이때 모세는 자신은 말을 잘못한다는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핑계를 대는 모세에게 능력의 지팡이를 주시며 애굽으로 이끄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가라 할 때 핑계하지 마세요. 어차피 하나님은 한번 명령하신 것은 거두지 않습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핑계를 알고 계십니다. 그냥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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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 2021-09-05 |
| 마더 테레사 수녀가 봉사했던 인도 켈커타의 한 어린이집 벽면에 걸려 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Anyway>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분별이 없고 /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당신이 선을 행할 때도 사람들은 / 이기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당신이 오늘 행한 좋은 일은 /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의 솔직함과 정직으로 인해 /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정직하라. -----중략 -----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내주어도 / 세상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켄터 케이스는 1946년 미국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 예일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며 변호사, 대학교수, 공직 관료, YMCA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가 쓴 <Anyway-그래도-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라는 책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책입니다. 켄터 케이스는 1960년대 하버드대학을 다니면서 세상이 온통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에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미국 사회는 흑백의 갈등과 흑인 인권운동, 히피문화의 등장, 경제의 대공항, 케네디 대통령 암살, 월남전 등 시대적으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나 혼자라도 바르게 살자고 합니다. 나 혼자라도 바른 삶을 살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변화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Anyway-그래도,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처럼 미친 세상에 나 혼자라도 작은 실천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진리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어렵더라도 우리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이 세상의 희망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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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5별 헤는 밤 | 2021-08-29 |
| 우리에게 <서시(序詩)>, <별 헤는 밤>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 용정에서 윤영석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세운 북간도 용정의 명동(明洞)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평양숭실 중학 과정에서 공부한 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마치고 일본의 동지사(同志社) 대학(기독교 사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시절 1943년 7월 방학을 맞이하여 귀국하려다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28살의 1945년 2월 사망했습니다. 재판 판결문에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분명 조선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그가 지은 시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을 보면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 내 이름자를 써 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 시인은 가을밤 하늘의 별을 헤아리면서 멀리 북간도에 있는 어머니와 어린 시절 추억들을 그리워하며 별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보면서 자신의 이름까지 붙여봅니다. 그러나 이내 부끄러워 자신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이유는 잃어버린 조국의 현실 속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의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매일의 뉴스가 부끄럽습니다. 귀가 있어 듣고 눈이 있어 보기는 하지만 더 이상 듣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의 대선주자들이 서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폭로하는 모습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낯 뜨겁고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끄럽다 하여 우리의 삶의 시간을 멈출 수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겨울 지나 봄이 오면 무덤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는 희망을 본 것처럼, 우리도 부끄러운 뉴스로 얼룩진 오늘이 지나면 희망의 파란 잔디가 피어날 내일의 봄날이 올 것을 기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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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허물을 덮어주는 삶 | 2021-08-22 |
|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장왕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이 어느 날 대신들을 불러서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등불이 모두 꺼져버렸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모두가 허둥대고 있을 때 한 궁녀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둠을 타서 한 신하가 궁녀의 몸에 손을 댄 것입니다. 궁녀는 자기 몸에 손을 댄 신하의 갓끈을 잡아당겨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궁녀는 왕에게 지금 자기 몸에 손을 댄 못된 신하가 있는데 갓끈을 잡아채어 끊어 놓았으니 빨리 불을 켜서 범인을 잡아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왕은 불을 켜지 못하게 하면서 신하들에게 모두 갓끈을 끊어내라고 엄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모든 신하들은 갓끈을 끊어냈습니다. 결국 누가 궁녀에게 손을 대었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왕의 이러한 배려에 신하들은 감동하여 더욱 왕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초나라와 진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쟁 중에 왕이 어려울 때 목숨을 걸고 왕을 보호해주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왕은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왕은 자기를 보호해 준 장군을 불러 후한 상을 주려하자 장군은 왕에게 상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옛날 잔치 중에 갓끈을 궁녀에게 잡힌 자가 자신이라고 하면서 왕은 자신의 명예를 지켜 주었고 또한 목숨을 살려주었기 때문에 왕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은 상 받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왕에게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허물을 감싸준 왕의 배려로 신하는 왕에게 충성을 다했고 왕은 또한 전쟁 중에 목숨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사랑을 깨달아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보다는 덮어주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 줄 때 우리의 공동체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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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3광복절 아침에 | 2021-08-15 |
| 오늘은 광복(光復) 제76주년 되는 날입니다. 1945.8.15.일 정오(낮12시)에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로써 우리 대한민국은 1910.8.29일 일본이 강압으로 한일병탄조약으로 주권을 빼앗긴 지 35년 만에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여 해방(解放)을 맞이하게 됩니다. 광복(光復)의 뜻은 “새롭게 빛이 비추다”는 뜻으로 어둠의 일제강점기를 지나 새로운 빛의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일제강점기 35년간 우리의 역사는 캄캄한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고통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우리 스스로 주권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주권이 없었기에 세계 속에 대한민국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산업은 수탈당하고 국토는 빼앗기고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갔고, 강제징용으로 징집되어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당하는 강제노역의 노동 착취를 당했습니다. 또한 여성들은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인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 선조들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얼마나 해방을 원했는지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 얼마나 비장한 표현입니까? 광복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쁨의 날이며 광명의 빛이 새롭게 비춘 날입니다. 무엇보다 일본이 신사참배로 교회를 탄압한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당시 많은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감옥에 갔으며 선교사님들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가르칠 수 없어 자진 폐교를 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강제추방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 신앙의 선조들은 3.1운동으로 대한독립의 뜻을 선언했고, 교회의 주일학교와 전국 곳곳에 학교를 세워 미래를 위하여 인재양성을 했습니다. 제76회 광복절 아침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나라를 사랑했으며 독립을 위하여 투쟁했는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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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21등보다 아름다운 꼴찌 | 2021-08-08 |
| 2016년 8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었습니다. 총 206개국의 1만1천여 명의 선수가 참석했으며 총 38개 분야의 경기 종목에 금메달 수가 306개였습니다. 올림픽에서 1등으로 금메달을 딴다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올림픽에서 금메달보다 더 값진 메달이 있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의 이름을 붙인 쿠베르탱 메달입니다. 1964년에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17개 메달만이 수여된 아주 영광스러운 메달입니다. 리우 올림픽에서 쿠베르탱 메달을 받은 2명의 선수가 있습니다. 메달의 주인공은 여자 5000m 달리기의 니키 햄블린(뉴질랜드)과 애비 다고스티노(미국) 선수입니다. 이들은 1등을 해서 메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꼴찌로 들어온 선수들입니다. 1등이 아닌 꼴찌에게 쿠베르탱 메달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여자 5000m 선수로 경기 도중 선두 그룹 3200m 지점에서 햄블린이 다리가 꼬여 넘어지면서 뒤따르던 다고스티노를 넘어뜨리었습니다. 이때 다고스티노는 일어나 다시 달리려 하다가 옆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햄블린을 보고는 자신의 경기를 포기하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햄블린은 다고스티노의 손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햄블린은 매달의 꿈이 날아가는 고통의 순간에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 다고스티노에게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보았다고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고백합니다. 더구나 햄블린과 다고스티노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여자 5000m 경기는 1등보다 아름다운 꼴찌들의 달리기였습니다. 지금 도쿄에서 올림픽이 한참입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1년이 지난 2021년 7월 23일에 개막을 했습니다. 도쿄올림픽의 남자 800m 경기에서 미국의 주잇과 보츠와나의 아모스 선수가 발이 엉켜 넘어졌습니다. 이들은 서로 일으켜 세워주고 함께 결승선에 꼴찌로 들어왔습니다. 2016 리우올림픽에서 햄블린과 다고스티노와의 아름다운 꼴찌가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보다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움 꼴찌들의 행진을 보고 싶습니다. 1등보다 아름다운 꼴찌들의 행진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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