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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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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천국가는 순례자 2019-12-15
영국 베스포드 주 엘스토우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존 번연(John Bunyan, 1628- 1688)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쓴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 Progress)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 되었습니다. 존 번연은 젊은 시절 청교도 혁명에 가담했으며, 청교도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12년간 갇혀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은 그가 억울하게 갇혀 있던 감옥에서 집필한 작품입니다.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리스도인(Christian)은 멸망의 도시를 출발하여 천성으로 향하는 순례길을 떠납니다. 주인공은 천성을 향한 순례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수다쟁이, 게으름, 고집쟁이, 허영의 도시’ 등 그 이름이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만나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천성에 도착합니다. <천로역정>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기독교 상담학자인 스캇 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인생이란, 뒤돌아보며 후회하며 가지 않는 길이 아니라,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라도,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걸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인생길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한 책입니다. 김석균 목사가 작사, 작곡한 “나는 가리라”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갈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나는 따라 가리라는 신앙의 각오를 표현한 복음송 가사입니다.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인생길에 모진 비바람과 험한 파도가 일어나도, 눈보라가 일어나도 결코 다른 길을 가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며 신앙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가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갑자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난이 덮쳐도 주어진 믿음의 길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처럼, 스캇 펙이 말하는 <아직도 걸어 가야할 인생길>이 있기에 김석균 목사의 <나는 걸어 갈리라>는 다짐의 복음송처럼 우리는 오늘도 천국 가는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238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2019-12-08
2019년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2019년 1월 1일 0시 우리는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2019년 새해 첫 시간을 맞이했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한 해 동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시편 90편에 모세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중국의 도종명 시인은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하루에 새벽을 두 번 맞이할 수 없고), 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때를 맞이하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여 주소서, 광음여류(光陰如流-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이 빠름)하오니 주여 인도 하소서”라는 은혜로운 가사가 있습니다. <성년부중래>, <광음여류>, <세월부대인>의 말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앞에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까? 일본의 여류작가 야마시타 히데코는 <버림의 행복론 –단사리(斷捨離)>에서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면 자연스레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말합니다. 단(斷)은 넘쳐나는 물건을 ‘끊는다’, 사(捨)는 불필요한 물건을 ‘버린다’, 리(離)는 끊고 버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물건의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즉 '끊고, 버리고, 이별하다’는 뜻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에 너무 소유욕에 집착하지 말고 단사리(斷捨離)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시편 90편에서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말씀처럼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무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2019년 뜻을 못 이루었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2020년은 우리 앞에 새로운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새롭게 결단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마지막으로 라틴어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 인생은 언제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를 말을 마음에 깊이 생각해봅시다.
237희 망 2019-11-24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럭 오바마는 2004년 자신의 정치 인생에 아주 중요한 기회가 찾아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통령 후보인 존 케리 후보 지지 연설자도 단상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오바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서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노예들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머나먼 이국땅을 향해 떠나는 이민자들의 희망입니다. 불가능을 향해 도전하는 공장 노동자의 아들의 희망입니다. 빼빼 말랐고 이름도 이상하지만 미국에 자신의 자리도 있다고 믿는 아이의 희망입니다. 희망! 어려움 가운데의 희망! 불확실함 가운데의 희망! 그 담대한 희망! 결국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자 이 국가의 기반입니다.” 이렇게 희망을 연설한 오바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사람으로 알려집니다.
그 후 4년 뒤 버럭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이 된 그는 취임 연설에도 “혹한의 겨울철에도 애국자들은 추운 강가의 꺼져가는 모닥불 주변에 모여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수도를 적군에 빼앗긴 채 눈밭이 피로 물든 상황에서, 혁명의 성과마저도 불확실하던 상황 속에서도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외우며 견뎌냈습니다. <미래의 세계를 생각하자. 희망과 미덕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겨울에도 공동의 위험에 놀란 도시와 나라가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나섰다>는 구절인데 그게 바로 미국입니다.” 이처럼 오바마 대통령은 희망을 연설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설립 50주년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50년째의 희년(禧年-땅과, 노예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해, 가난한 자에게 빚을 탕감하는 기쁨의 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상대방에게 희망을 선포하여 듣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아지는 말과 (2)늘 부정적 말을 하여 듣는 사람에게 짜증과 분노를 일으키는 말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50주년 희년을 선포하는 희망과 기쁨의 공동체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희년의 기쁨을 마음에 누리며, 이웃에게 희년의 자유와 희망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그러기에 부정적 말보다는 상대방에게 희망과 기쁨을 전달하는 복음의 증인이 됩시다.
236희년의 기쁨 2019-11-17
구약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절기 중에 희년(禧年) 제도가 있습니다. 희년(禧年, 영어: jubilee, 히브리어: ????, yobel 요벨-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다)은 구약 시대에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부릅니다. 희년이 되면 농사짓던 땅에 휴식을 주며, 각자가 소유했던 모든 땅을 출애굽 때 제비뽑아 분배받은 기업으로 되돌리는 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매매하거나 혹은 소유권을 저당 잡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 영구히 소유권 이전을 하는 매매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땅을 매매하거나 저당 잡힐지라도 희년이 되면 조건 없이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5장 10절에 희년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
희년은 땅만 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로 삼았던 사람에게 자유를 줍니다. 주인이 노예의 속량(贖良 몸값을 받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일) 즉 몸값을 받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대가없이 노예를 속량해주고 자유를 선포합니다. 주인에게 속박되었던 노예가 자유를 얻는 기쁨의 날입니다. 또한 희년은 가난하여 이웃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줍니다. 탕감해주면서 기뻐하고 탕감을 받으면서 감사하는 것이 희년제도입니다. 유대인 월력으로 7월10일에 제사장들이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며 희년을 선포합니다. 나팔이 울려 퍼지면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1년 동안 희년의 기쁨을 모두가 누립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만 49년을 보내고 50년째가 되었습니다. 50년의 희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에 땅을 돌려주며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열고 이웃에게 복음의 기쁨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마음의 진 빚이 있으면 용서하며 탕감해주는 희년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희년의 기쁨에 동참합시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사61:1-2)
23550주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2019-11-10
황해도 은율 출신의 순수시인 김종삼(1921-1984) 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깊이 있는 믿음을 가진 신자는 아니지만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시인은 분명합니다. 그의 시상은 항상 현실 문제보다는 영혼의 심미적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부>에서 인생을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 된다“고 표현을 합니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어부> 김종삼--

어부가 바다에 나아가 고기 잡는 일은 언제나 풍랑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부가 고기잡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러한 어부의 삶을 김종삼 시인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2019년 11월 첫 주일 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니 기적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김종삼 시인의 표현대로 살아온 것이 기적이며 앞으로 살아갈 것이 기적입니다. 50주년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어제의 일에 감사, 오늘 하나님께 영광, 내일을 위한 희망의 도전! 살아온 기적 갈아갈 기적 우리 교회 참된 교회! >
234구속(救贖)과 구속(拘束) 2019-11-03
우리의 일상생활에 자주 쓰는 말은 아니지만 법률 용어에는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나옵니다. 법률 전문가들도 사전을 찾아보아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어떤 용어들은 아예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도 있습니다. 법률 용어 중 蒙利(몽리)', '貯置(저치)', '轉囑(전촉)', 장리(掌理)'등 어려운 단어가 법조문에 나옵니다. '몽리'는 '저수지 등 수리시설의 혜택을 입음'이라는 뜻이고, '저치'는 '저축하여 둠', ‘전촉’은 ‘다른 기관이나 사람에게 맡기다’, ‘장리’는 일을 맡아서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법률 용어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경에도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나옵니다. (잠13:24)"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잠11:13)"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여기에서 <초달>은 잘못을 다스리기 위하여 회초리를 때리는 일이고, <한담>은 심심풀이로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어려워서 뜻을 모르는 말이 있는가 하면 뜻을 잘못 이해하고 혼동하여 쓰는 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구속(救贖)을 구속(拘束)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속(救贖)은 “억압당하고 있는 노예의 몸값을 주인에게 주고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속(拘束)은 법률 용어로 “법원 또는 판사가 피의자나 피고인을 강제로 잡아 가두는 일”을 말할 때 씁니다. 구속(救贖)과 구속(拘束)은 한글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릅니다. 구속(救贖)은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말하고 구속(拘束)은 자유로운 사람을 강제로 억압하여 잡아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속은 대부분 구속(救贖)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의 말씀은 구속(救贖) 즉 속량(贖良-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지불했으니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으니 구속(救贖) 즉 속량(贖良)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는 1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구속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233종교개혁(the Reformation) 2019-10-27

오늘은 제502주년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몇 년 전 종교개혁에 대한 칼럼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의 항의문을 발표한 시점을 종교개혁의 출발로 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 역사에서 워낙 큰 사건이기에 때문에 정관사(the)를 붙인 대문자(Reformation)로 표기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표현할 때 “종교개혁” Reformation는 항상 대문자로 씁니다. 그만큼 큰 사건이기 때문에 고유명사이며 대문자로 쓰는 것입니다. 최근에 다른 종교에서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기독교만의 전용 용어가 아니라 불교도, 이슬람도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하여 기독교의 종교개혁(the Reformation) 과 구분하기 위하여 소문자로 종교개혁(reformation)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기독교만의 용어가 아니라는 비판이 일어나자 중립적 용어로 <교회개혁 church reformation>이라고도 쓰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단어 Reformation는 다시(Re)+ 형태(form)의 뜻으로 본래의 형태를 부수고 바르게 형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자의 <개혁>(改革)이라는 말은 “기구나 제도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침”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고친다는 “개”(改)와 가죽이라는 “혁”(革)이라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가죽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하는 작업은 가죽을 만드는 과정처럼 어려운 과정입니다. 어떤 제도나 기구를 새롭게 개혁한다는 것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크게 반발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죽을 만들려면 동물을 잡아 얻은 생가죽에 기름을 빼는 무두질이 필요합니다. 생가죽을 물과 화공약품에 담그고 때리는 무두질이 없으면 가죽은 뻣뻣하여 쓸 수 없게 됩니다. 무두질은 끈질긴 작업이며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이처럼 개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가죽에 무두질을 하듯 종교개혁은 생명을 건 투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은 가죽을 만드는 작업처럼 어려운 작업이기에 순교를 각오한 끈질긴 작업입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을 1517년의 단회적 사건으로 보지 말고 날마다 계속되는 개혁의 작업으로 우리 마음을 가죽 만드는 어려운 작업처럼 날마다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232작은 시작, 큰 기적 2019-10-20
몇 차례 소개했던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은 아주 짧은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실재의 인물입니다. 그는 1913년부터 해발 1,200M-1,300M 프랑스 프로방스 고산지대 황무지에 매일 도토리 100개를 심습니다. 아무 말 없이 홀로 3년 동안 10만개를 심었습니다. 주인공은 52세부터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37년 만인 89세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심은 나무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의 큰 숲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황무지에 나무를 싶어 숲을 회복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인도의 마주리 섬이 홍수와 가뭄으로 완전히 황폐해졌을 때 파옝이라는 젊은이가 40년간 홀로 나무를 심어 160만 평을 완전한 숲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충남 태안반도 끝자락 있는 천리포 수목원은 1946년 연합군 중위로 한국에 처음 오게 된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1921-2002 /민병갈(閔丙渴-한국 귀화)가 1962년 17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1970년부터 40년 동안 나무와 식물을 가꾸어 13,200여 종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천리포 수목원을 이룬 민병갈 선생과 형제처럼 지낸 민병도 선생 역시 남이섬에 나무를 심어 오늘의 아름다운 남이섬을 만들었습니다. 전남 장성군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조성한 춘원 임종국 선생은 1956년부터 76년까지 20여 년간을 헐벗은 산 570㏊에 28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오늘의 편백나무 숲을 만들었습니다. 제주도 한림농원은 1971년 송봉규 선생이 황무지의 모래땅을 매입하여 오늘의 한림농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복음 운동의 시작은 언제나 작게 출발하지만 나중은 창대케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회복을 위하여 일천일 부흥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작은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나무를 심고 기다리면 황무지가 숲으로 변하듯 영적 부흥을 갈망하며 작은 기도부터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큰 영적 부흥을 주실 줄 믿습니다.
231무제(無題) 2019-10-13
우리나라의 고전 ‘흥부전’에 형 놀부와 동생 흥부가 나옵니다. 동생 흥부는 마음씨가 착하고 선한데 놀부는 그 행동이 악하고 해괴합니다. < 초상난 데 춤추기, 불난데 부채질하기, 우는 아기 똥 먹이기, 아이 밴 여자 배 차기, 우물곁에 똥 누어 놓기, 애호박에 말뚝 박기, 비오는 날에 장독 열기 > 이러한 것이 놀부의 심술입니다. 언젠가 대학교수들이 놀부의 심술에 대하여 전공별로 표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육학 전공교수는 놀부의 심술은 천재적이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천재적 행동이 놀부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놀부의 돌출행동을 창조적 가능성으로 봅니다. 심리학을 전공하신 교수는 놀부의 성장 배경을 먼저 검토해야하는데 놀부는 분명 애정 결핍의 어린 시절을 보냈든지 아니면 어떤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행한 성장 과정이나 충격적 사건이 놀부의 심리적 내면을 지배하기에 그의 외적 행동이 과격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놀부의 행동을 창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심리치료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개성 있는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서로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광화문 집회, 서초동 집회로 나누어져 서로를 반목하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한 사람을 놓고 보수에서는 뻔뻔한 진보라고, 진보에서는 적폐의 대상인 무식한 꼰데 보수라고 하면서 서로에게 적대적 행동을 합니다. 누가 보아도 분명 국론 분열입니다. 이렇게 분열된 마음이 계속 진행된다면 마지막은 서로를 미워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싸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작은 의사 결정이 미운 감정으로 발전하고 마지막에는 살인과 전쟁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야합니다. 국가도, 교회도, 직장도, 가정도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이 정답입니다.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230나는 누구인가? 2019-10-06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 목 졸린 사람처럼 숨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서는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1945년)목사 는 독일 루터교회 소속이며 반 나치운동을 하며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모임에 가담하였다 1943년 3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1945년 처형됩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처형되기 전 1945년에 쓴 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숨길수 없는 존재임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